오늘의 말씀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거듭난 삶 2019. 5. 2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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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에 청함을 받음.

 

: [ 2:1-1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

 

"사흘 되던 "

 

이것은, 1:43 기록된 날부터 계산된 날짜인 듯하다.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렇게 자세히 날짜까지 기록한 것은, 저술자가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실을 확증한다.

 

"갈릴리 가나."

 

팔레스틴에는 밖에 다른 "가나" 지방이 있는 것인 만큼, 여기서 "갈릴리" 말을 붙여서 밝힌다.

이곳은 나사렛 동북편 5마일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혼인" 기쁨의 상징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복음이 율법과 달라서 주는 기쁨이 가정적(家庭的)이고 보편적(普遍的) 것을 표상(表象)한다.

 

 

 

[ 2:2] 예수와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 예수님은 염세주의(厭世主義) 가지신 이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이것은 그의 겸손인 동시에 그의 긍휼이다.

성결은 격리(隔離) 아니다. (Sanctity is not singularity).

 

 

 

[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당시에 "포도주" 팔레스틴에 있어서 일반 음료였고, 다른 나라에서처럼 유흥과 오락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틴은 사막 지방과 같아서 물이 귀하므로 과즙으로 음료가 필요하였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더러 "포도주가 없다" 것은, 포도주를 기적적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겸손히 말한 청원이다.

 

예수님께서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었을 터인데, 그의 모친께서 이런 청원을 어떻게 하였을까? 그것은 난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이적을 행하신 일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인격에 초자연적이고 비범한 일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인 만큼, 모친 마리아로서는 그에게서 이적을 기대할 하였다.

 

 

 

[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

 

그가 자기 어머니더러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하대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한국 풍속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같으나, 헬라 어풍(語風)으로는 그것이 무례한 말이 아니다. (Hendriksen).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신 것에는 뜻이 있다.

 

메시야의 공적역사(公的役事)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만이 주장하고 혈통적 모친 권세가 간섭할 없다.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모친도 하나의 "여자"로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여기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실 때에, 그는 자기 어머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자로만 취급하신 것이다.

 

메시야의 공생애(公生涯) 있어서, 예수님은 그의 하실 일을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만 하시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는 혈통적 인연에 매이지 않아야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171-172).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런 표현은 구약에도 많은데 반드시 냉정한 어투는 아니다.

 

( 11: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삼하 16: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왕상 17: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죄를 생각나게 하고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왕하 3: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나이다),

 

말씀은, 메시야의 구속(救贖)사업에 있어서는 비록 예수님의 모친이라도 모친 권세로써 간섭할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 밖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도울 중보자(中保者) 없다.

 

"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이른바 " " 말은 메시야의 영광을 나타낼 때를 의미한다.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8:20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7:1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그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혼인잔치에 포도주 그것을 보급시키신 자선 사업을 목적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메시야로 확실히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11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 이른바, " "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의 권능을 나타내실 일정한 시간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어 그의 중보 역사의 일체를 시행하신다. 그리고 점에 있어서 그의 순종은, 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대로 맞추어 움직이신 것이다.

 

이런 일은 일반인으로서는 생각도 없는 절대 완전하신 순종이다.

 

 

 

[ 2:5]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이것을 보면, 모친이 예수님의 의미하신 바를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순종하여 성역을 이루어 나가신 사실이, 모친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의 성역(聖役) 순종으로 일관하셨다.

그러므로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순종 일관주의에서 움직여야 한다.

 

모친은 하인들더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라고 부탁한다.

 

순종은 무엇에서든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는 비결이다.

 

 

 

[ 2: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유대인의 가정에는, 연회할 때에 물을 많이 사용하기 위하여 항아리를 비치하였다.

 

그것은, 주로 식사 전후에 씻는 예식을 행하기 위함이었다.

풍속은 성경이 제정한 것이므로, 진정한 종교적 의의와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런 번잡한 예식을 변하여,

맛있는 신약의 종교(포도주는 신약의 기독교를 상징함) 변화시켰다.

 

그것이 물론 포도주를 만드신 비유적 의미이다.

 

" 드는 항아리" 용량(用量), 77리터, 혹은 115리터에 해당된다.

 

이렇게 항아리가 여섯이나 놓여 있었다.

 

우리 본문이 이렇게 많은 분량에 대하여 관설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의 많은 분량을 말하여, 그의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지적하려는 까닭이다.

 

 

 

[ 2:7-8]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

 

하인들은 즉시 순종하였다.

 

"연회장", 풍속에 연회의 손님들 주빈이었다고 한다.

 

이적에 있어서,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한 없고, 다만 고요히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런 기적이 나타났다.

 

 

 

[ 2:9] 연회장은 물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연회장은 물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주님의 기이한 역사의 유래를, 사람마다 알지 못하나 오직 주님께 충성하는 종들만은 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다음과 같다.

 

(1) 복종의 원리.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침묵하며 순종한 하인들더러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였다.

 

(5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것은, 무조건 순종을 말함이다.

무조건 순종은 하나님께만 하는 법인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 대우를 받으신 것은 당연하다.

 

과연 하인들은 조금 후에 그렇게 순종하였다(7-8).

 

루터(Luther) 말과 같이,

 

참된 신앙의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일을 지정해 드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복속시킨다.

(Wahrer Glaube schreibt Christus nicht vor-wad er tunsoll-,sondern weiss sich darin zu schicken.-Evangelien Auslegung, 4, P.93).

 

 

(2) 변화의 원리

 

(6-9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결례의 항아리 물의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권능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성도가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악한 사람이라고 변화시킬 있다.

 

1733년부터 선교사들이 5 동안 창세기 1장을 가르쳤어도 하나님의 인상도 받지 못하던 에스키모족 중에서도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겼다.

 

루터(Luther),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변화시킬 있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Evangelien Auslegung, 4,P.98).

 

그리스도의 구원운동은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을 세상보다 선미(善美) 내세(來世)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 이른 "좋은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구원의 기쁨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1) 혹설에, 여기 "좋은 포도주" 취할 있는 강한 술을 의미한다고 하나, 반드시 그렇다고는 없다.

 

이유는, 그것이 이적으로 만든 것인 만큼 취하게 하는 성분이 강하지 않고도 좋은 술일 있다.

 

(2)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발효(醱酵)하지 않은, 취하지 않는 술이었을 것이라고 하나, 그렇게 주장할 만한 본문의 증거는 없다.

 

설혹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은 취할 있는 성질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들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절제" 덕을 가르친다.

 

(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2:11]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여기 "표적"이란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리는 신령한 증표라는 뜻이다.

 

" 영광을 나타내셨다" 것은, 메시야의 증표로서의 권능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