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거듭난 삶 2019. 5. 27.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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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최초의 기적

 

요한복음 2:1-11 :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최초의 기적이었다.

 

그는 전에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그는 후에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의 기적은,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기적으로서 시작하셨던 것이다.

 

 

최초의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모범적인 기적이었다.

예수의 행하신 수많은 기적의 의미와 정신은 아주 분명하게 최초의 기적에 있어서 나타났다.

 

먼저 1 알아야 것은,

 

이것이 사실로 기적이었던 일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선의에서 나온 현혹적 행위는 아니었다.

 

실로 기적이었다.

물이 포도주가 것이다.

그리스도라 일컬어지는 예수께서 조물주이심의 표적으로서 행하신 일이다.

 

'만물,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다. 지은 중에 하나도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 지은 없다'(1:3) 있는

 

말씀의 증명으로서 행하신 것이다.

 

'만물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다'(골로새서 1:16) 것은,

 

초대의 신자가 예수에 대하여 공언하여 조금도 주저치 않았던 바이다.

예수는 인류의 구주였다.

그리고 조물주 이하의 것이 인류의 구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새로 영을 지음 받아 구원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 새로 지음 받는 것이다'하고,

 

'우리(신자) (하나님) (새로이) 만드신 바라'(에베소서 2:10) 한다.

 

만물을 만드실 있는 자가 아니면 새로이 영혼을 만들 수는 없다.

조물과 구령(救靈)과의 사이에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구제의 성업을 개시하심에 있어서 여기서 조물의 대능을 보여 주시어,

그가 실로 인류의 구주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무미한 물로서 감미로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는 아주 평범한,

헛되고 헛된 인생으로 하여금,

의미 있고 흥미 있는 자로 되게 하실 것의 표적이다.

 

예수에 의해 변화되지 않고서의 인생은 담담하기(싱겁기) 같은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물이다.

예수께 새로 지음 받아,

맛있는 포도주로 되는 것이다.

 

오인은 이것을 오인의 신생의 실험에 의해 알았다.

오인은 예수께 동화되기 전의 생애와 후의 그것을 비교하여 보고,

실로 가운데 물과 포도주와의 상위 있음을 아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오인은 모른다.

오인은 다만 바울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것이다'(고린도전서15:10)라고.

 

포도주는 물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편104:15) 이다.

 

그리고 예수께 화해져 사람은 기쁨의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염세가는 아니다.

비분강개가는 아니다.

언제나 자성하여 죄를 슬퍼하며 불의로 우는 자는 아니다.

 

그는 죄에서 구출된 자이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자이다.

때로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자이다.

 

감사하는 자이다.

찬미하는 자이다.

 

철인(哲人) 파스칼(Pascal, Blaise 1623. 6. 19-62. 8. 19. 프랑스의 과학자, 철학자, 그리스도교 사상가) 하나님께 취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크리스천은 철인 같아,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환희의 영에 취한 자이다.

 

'싱거운 , 어찌 소금 없이 먹을 있으랴 달걀의 흰자위가 어찌 맛이 있으랴'(6:6참조)

 

욥이 탄식한 무미의 인생도,

예수의 신생의 기적을 입어,

마셔도 싫증나지 않는 좋은 포도주로 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최초의 기적을 혼연석에서 베푸셨다.

 

실로 자신이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이하여 혼례연을 베풀기 위해 세상에 임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때 이미 새로이 5인의 제자를 얻어,

신부를 맞이한 같이 기뻐하신 것이다.

 

혼연석과 여기에 환희를 주기 위한 포도주 예수의 일생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보다 적절한 것은 없다.

자신이 신랑,

그의 제자가 신부,

그의 복음이 포도주

 

그가 그의 세상의 생애 끝에 있어서 한동안 제자들과 작별하시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후,

너희와 함께 새로운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 있어서 마시는 까지는, 다시 포도주로 만든 것을 마시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6:29) 하신 것은,

 

가나의 있어서의 그의 최초의 기적을 회상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의해야 것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방법이다.

 

그는 여기서 크신 기적을 베푸셨다.

하지만, 그와 그의 어머니와 그의 5인의 제자를 제외하고서는

누구도 기적을 알지 못했다.

 

하인(일꾼)들은 다만 명함 받은 대로 새로 만들어진 포도주를 날랐을 뿐이다.

 

사회자는 '술로 변한 물을 맛보고, 어디서 것을 몰랐다' 것이고 보면,

다만 이것을 맛보았을 뿐이고 어떻게 되어 만들어졌는지를 묻지 않았다.

 

신랑도 신부도 내빈 일동도,

다만 맛좋은 포도주의 대접을 받았을 뿐으로,

사람도 유래를 알려고는 하지 않았다.

 

실로 예수는 언제나 은밀히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낸다고 하여 사람에게 보이기 유한 기적은 아니다.

 

신자(제자) 신앙을 돕기 위한 기적이다.

불신자를 놀라게 하기 위한 기적은 아니다.

불신자에게 인정되지 않는 대도 좋은 것이다.

 

그들은 다만 은혜를 입으면 좋은 것이다.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사람 앞에 행하는 일을 삼가라'(마태복음 6:1-3)

가르치신 예수는,

 

여기서 자신, 사람의 칭송을 받는 없이 시여를 하신 것이다.

 

장소는 혼연석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마련한 것은 신자가 아니라 보통 일반인이었다.

 

그리고 이에 응대하는 맛있는 포도주로서 했다고 한다.

 

이것 예수께서 하실 일일까?

술은 독물이 아닌가?

향연은 물자의 낭비가 아닌가?

예수는 이것을 금해야 아닌가?

눈살을 찌푸리고 이에 대해야 아닌가?

 

그런데 제자와 함께 이에 임하고,

기적을 실시해서까지 흥을 도우셨다고 한다.

 

실로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보다도 넓은 마음을 가지신 예수에게 있어서는 이는 결코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선의에서 자발적으로 이것을 하신 것이다.

 

세상에 곤혹한 많다 해도,

객을 청해 놓고서 이를 대접할 모자라는 같은 것은 없다.

이는 곤혹의 극이다.

 

일은 집의 소사이라 해도.

체면(명예) 관계되는 중대사이다.

 

그리고 예수는 호의로서 그와 그의 제자들을 청하는 일가가 지금 곤혹에 빠진 것을 보고, 이것을 구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선의는 그의 '주의'(anism) 이긴 것이다.

 

그는 술의 해악을 아셨다.

'이것은 마침내 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리라'(23:32 참조) 것은,

 

그가 솔로몬의 잠언에서 읽은 바이다.

여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빈객과 함께 포도주를 마셨다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아마도 이에 손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때는 금주론을 주장할 때는 아니었다.

포도주가 모자라 주인은 체면 잃어 향연은 실패로 끝나려는 위급한 경우였다.

 

예수께서 어찌 이것을 묵과 있을 것인가?

 

사람이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여기서 대능을 발휘하시어, 그들의 기쁨을 도우신 것이다.

 

그는 심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이는 아니다.

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는 세계의 대구주시라고 하여 개인의 곤혹 같은 것은 돌아보지 않으시는 이가 아니다.

 

가나의 혼연의 자리에 있어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여 일가의 면목을 유지하게 하신 그는,

 

지금도 우리들의 기사에 관여하시고,

우리들이 날마다 빠지기 쉬운 많은 곤혹에서 우리들을 구하시는 것이다.

 

예수는 실로 사람의 친구이시다.

대사에 있어서의 친구이시다.

소사에 있어서의 친구이시다.

그는 인생 전체를 축복하시기 위해 세상에 임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제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

그는 가나에서 최초의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 일을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것은, 기적(표적) 처음인데, 영광을 드러내셨다'(11참조) 있다.

 

'영광'이란, 그의 세상의 터가 놓여지기 전부터 그의 성부와 함께 가지고 계신 것으로서 그의 신성이시다.

 

'그러내다' (나타낸다) 것은,

'밖으로 나타낸다' 것으로,

제자가 관찰할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광 신성은 능력(권능; ) 하지 않는다.

덕성도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조화의 능력 (권능) 나타내시어,

그의 신성을 보이셨다.

 

동시에 그의 선성을 나타내 하나님의 마음을 명시하셨다.

기적은 표적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마음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순간에 물로 포도주 되게 있는 능력,

이에 합쳐 선을 행하고도 이를 숨기고,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은혜를 입게 하고,

자신은 선행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가지가 기적에 나타나, 이로써 예수는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처럼, 예수의 영광은 사람의 영광과 다르다.

 

사람의 영광은 사람에게 인정되는 영광이다.

하지만 예수의 영광은 사람에게 인정되지 않는 영광이다.

 

대성공, 대사업이라고 하여,

사람에게 칭송되고 사회에 인정되는 영광은 예수의 영광은 아니다.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

그리스도 교회가,

영광이라고 보는 것은 결코 예수의 영광은 아니다.

'제자, 그를 믿었다' 있다.

 

이것으로 기적의 목적은 달해진 것이다.

예수는 제자에게 그를 믿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는 물론 그를 위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들 위해 필요했다.

 

예수를 아는 , 이는 참된 생명이다.

그리고 연석에 참여한 주객 일동에게 맛좋은 포도주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의 제자에게 영원토록 없는 생명수를 주기 위해,

그는 여기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제자, 그를 믿었다' 한다.

 

그를 어느 정도 요해했던 것이다.

그의 능력과 마음을 것이다.

참된 메시야가 무엇인지를 것이다.

 

그가 능력 있는 은혜로우신, 겸비한 분이심을 명시 받은 것이다.

 

찬미하리로다, 예수!

 

 

* 내촌감삼의 글을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