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거듭난 삶 2019. 5. 30.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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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神性)

(남성적 그리스도교)

 

 

요한복음 2 13-17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것을 기억하더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 예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 , 비둘기를 파는 바꾸는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새끼를 만들어, 그들 , 소를 성전에서 쫓아내며,

바꾸는 자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뒤엎으시며,

비둘기를 파는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가져가라, 아버지의 집을 물건매매의 집으로 삼지 말라고.

제자들, 주의 집을 위한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기록된 것을 생각해 냈다'(요한복음 2:13-17)

(624 즈노하즈 자택에서)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그리스도는 자비 일방의 구주시라는 것은,

지금의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지는 일반적 감상입니다.

 

그리스도는 불쌍히 여기서는 ,

용서하시는 ,

그의 안중에는 다만 유서(pardoing),

연민(compassion) 눈물 있을 뿐이라는 것은,

대개의 그리스도 신자가 마음에 생각하시는 바입니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그리스도는 부인 같은 사람입니다.

 

'그대가 나를 귀히 여기는 사랑은 세상의 흔한 아니다.

부인의 사랑보다도 낫다' (사무엘하1:26)라는 것은,

 

신자 전체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품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관념입니다.

그리스도는 부인 같은 구주는 아닙니다.

 

그가 약한 듯이 보인 것은,

그에게 비상히 강한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엄격한, 세찬, 굳은 사랑입니다.

 

성서를 읽고서 그리스도를 부인같이 아는 것은,

오해의 가장 것이라 하지 않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노하셨습니다.

종종 노하셨습니다.

 

그가 전도를 시작하심에 있어서,

이른 '처음 성전청결' 있었습니다.

 

전도를 끝마침에 있어서,

이른 '마지막 청결' 있었습니다.

 

( 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처음에는

 

'가라, 아버지의 집을 매매의 집으로 삼지 말라' 책망하시며,

 

바꾸는 ,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파는 자를 성전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전의 도적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보다 격렬한 말씀을 쓰시어,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경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는 결코 유약한 구주는 아니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노를 나타내셨습니다.

 

실로 여호와의 집을 위한 열심이 그를 삼키기까지 노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완강(stbbornness) 바리새인을 보고 번이나 노하셨습니다.

 

'예수, 노를 가지시고 둘러보시고, 그들이 마음 완악함을 근심하시며'(마가복음 3:5) 라고.

 

그는 종종 그의 제자의 신앙의 둔함을 보고 안타깝도록 느끼시며,

노성을 발하셨습니다.

 

'아아, 믿음 없는 세상이다,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으랴!'(마가복음 9:19) .

 

이는 실로 인내가 이제 끊기려는 소리입니다.

특히 베드로가 주님의 구세의 사업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게끔 하려는 ,

그리스도의 노는 극도에 달하여,

그를 질타(scolding)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역에 '경계하여'라고 있음은 지나치게 약합니다. '질타하여-꾸짖어'입니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마가복음 8:33)

 

매리(abuse),

질책(reproach) 말로서 이것보다 세찬 것은 없습니다.

 

자기의 제자를 사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때 예수는 베드로가 악마의 앞잡이(agent) 되어 그를 유혹하려 것을 세차게 노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노하셨습니다.

그는 노하는 그것으로서 나쁜일(악사)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더럽혀진 ,

공의가 무시된 ,

그는 노를 발하셨습니다.

 

노는 불의에 대한 사랑의 발분입니다.

하나님께 성스러운 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도 또한 노하심이 있음은 결코 괴이히 여길 못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

특히 지금의 그리스도 신자는 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는 모두 그리스도교적 행위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들이라 해도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노합니다.

자기의 명예가 상처를 입는 ,

자기의 이익을 손상당하는 때에는 그들은 아주 노합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는(떠들며) 욕을 퍼붓기도 하고,

헐뜯기도 하며.

많은 간책(a sinister scheme) 써서 그들의 적을 넘어뜨리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 졌다고 해서,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해서,

사회의 공의가 유린당했다고 해서,

그들은 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은 지극히 냉정합니다.

그들은 노하는 것은 손해라고 합니다.

건강에 해가 있다고 합니다.

 

노하여 일이 이룩되지 못할 것을 말하여 냉정 인내를 권합니다.

 

여호와의 위한 열심은 그들을 삼키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공적 죄악에 대해서 극히 광량대도입니다.

 

지금의 사람이 죄를 증오하지 않음은 현저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감과 동시에 그를 오해함과 동시에 죄의 됨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죄란 경우가 그렇게 만드는 바로서,

불쌍히 여길 것인지,

책할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절도는 빈이 그렇게 것이라 합니다.

간음은 자유연애가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죄악을 경우(a situation) 결과로서 설명해버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안중에는 죄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임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병의 일종입니다.

의지의 박약입니다.

 

불쌍히 여겨야 , 동정해야 것이지, 노해야 , 견책(rebuke)해야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그런 유약한 헐거운 관념을 가지게끔 했는가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저명한 것은 이기심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죄를 책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죄를 책망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너희가 남을 비난(논의)하듯, 자신도 비난받을 것이다. 너희가 남을 헤아리는 대로, 자신도 헤아려질 것이다'(마태복음 7:11) 라는 말씀을

 

아주 천박하게 아주 이기적으로 해석하여,

남을 용서하며 자기의 죄도 용서 받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유서(pardoning)라는 것은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유서(용서) 교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 위해 구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공의까지 자기 위해 사용하려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 예화에 있는 슬기로운 불의 청지기 (관리인)같은 사람으로서,

주인(하나님) 대금은 모두 이것을 부채자에게 용서해 주고 자기가 세상에 입신할 때의 편의(convenience) 소용(sere)하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람의 죄에 대한 방종한 관념은 모두 이것을 그들의 이기심에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애독하는 근세문학이 일에 크게 세력 있음은 이것 역시 부인할 없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관대의 태도는 근세문학의 특질입니다.

괴테(-1 107역주) 극작,

졸라의 소설,

기타 이들 소위 문호의 흐름을 따르는 문학은 가지 일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 이들은 모두 성서가 죄를 보는 같이는 이것을 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불품행(misconduct) 또는 간음하는 자를 심판하신다'(히브리서13:4) 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간음을 불쌍히 여깁니다.

옳습니다.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는 이에 대하여 뜨거운 동정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연애의 신성' 말합니다.

간음을 노하지 않고서 간음을 노하는 사회의 압제무정을 노합니다.

 

이들은 연애의 챔피언(champion)으로서 자임합니다.

신화를 자유연애의 기초위에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4 43역주) 무엇입니까?

 

여주인공 마가레트는 명백한 간음을 범한 자입니다.

그녀는 정부와의 밀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그녀의 실형은 죄의 회합을 방해하려다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하는 바로 되었습니다.

 

그녀는 물론 법의 문책을 받아 비참한 죽음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소녀 마가레트는 대죄를 범하면서도,

그리스도교가 요구하는 같은 회개의 고뇌를 거치는 일없이

성모 마리아의 곁으로 옮겨져

거기서 다른 천사와 함께 그녀의 정부의 승천을 맞이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읽고서,

누구도 간부 마가레트에 대해 노를 발하는 자는 없습니다.

다만 그녀를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그녀에게 적지 않은 동정을 표시하지 않을 없기에 이릅니다.

 

기타 괴테의 저작에 대하여 하나하나 비평을 시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체로 부도덕한 ,

남녀의 관계를 그리는데 있어서 방종하고,

느슨한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가 근세 1류의 문호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미루어 알만 합니다.

그리고 근세문학에 그치지 않습니다.

 

문학이라는 문학,

특히 Belles Lettres 미문학(polite literature)이라고 칭하는 것은,

고금동서의 구별 없이,

종류의 연약한 사상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그리스문학에 있어서는

()시인 사포,

일본문학에 있어서는 가지로 무라사끼 시끼부,

모두 견고한 남성적 정신을 불어 넣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순문학 그것이 전체로 여성적이고 유약합니다.

연애를 위해 자살을 권하는 목적의 것입니다.

그리고 근세문학의 특히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화를 받은 오늘의 사람이,

특히 지금의 청년 남녀가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칭하는 청년 남녀가,

슬퍼해야 연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할 것도 없이 이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옳습니다. 사랑이신 까닭에 불살라 버리시는 불입니다.

오예(dirtiness) 참을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벌해야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나훔 1:3)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것은 무조건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자유로 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신앙(믿는 ) 의롭다하여 사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문책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들의 죄의 극단의 문책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들의 죄의 극악을 아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자기에 대한 타인의 죄는 모두 이것을 사해야 것입니다.

 

'너희는 서로 참고, 만약 사람에게 책해야 있으면 이것을 용서하라

그리스도 너희를 사하심 같이, 너희도 그렇게 것이다'(골로새서3:13) 라는 것은

이를 말함입니다.

 

우리에게 자기의 적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기에게 해를 가한 자는 모두 이것을 사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사물에는 공사의 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함 받으리라. 하지만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는 사함 받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2:10).

 

그리스도로서,

그가 사하고자 하여 사할 없는 사람의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죄는 모두 이것을 사하지 만도 성령을 욕되게 하는 (모독죄) 사함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시인은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오니이까? (당신) 거슬려 일어서는 자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오니이까'(시편139:21).

 

자기의 적은 이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

정의의 ,

인류의 적은 이것을 증오하지 않으면 됩니다.

 

정을 위해 국가의 적을 용서하는 자는 불충의 백성입니다.

비스마르크(-2 243역주) 일찍이 독일 연방회의에 임석하여 말했습니다.

'제군, 나를 친대도 나는 결코 반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황제폐하를 치고,

독일 제국의 존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는 있으면,

나는 조매(reviling) 갚을 것입니다. 타격으로서 타격에 대할 것입니다'.

 

철혈재상의 강의견심(fortitude),

그럴 것입니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정의. 순결 신성에 대한 열심히 없어서는 됩니다.

불의를 분내고 불결을 미워하며, 설독(profanety) 노하는 열심히 없어서는 됩니다.

 

이것이 없는 자는 무골한(spineless)입니다.

진리 위해서라면 죽음을 마다 않는 용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 있어서는,

지금의 그리스도 신자 중에 있어서는,

그러한 노를 발하는 자는 무자비한 자로서 증오됩니다.

 

다수의 동정은 언제나 죄를 범한 자위에 있고,

이것을 분내는 위에는 없습니다.

 

죄악은 모두 이것을 사하는 교사,

이것이 인망 있는 교사입니다.

 

사람은 모두 약한 ,

특히 여자는 약한 ,

정은 무른 ,

그리고 죄는, 약한 사람이 여린 () 인하여 (),

이것은 용서해야 ,

불쌍히 여겨야 ,

용서해야 것이라고 하여,

눈물로서 죄인을 대하는 교사가 환영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성서가 우리에게 명하는 바의 죄인 대우의 길은 아닙니다.

 

이는 모세, 여호수아, 나단, 바울이 취한 길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죄인을 사랑해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까닭에, 그들이 죄를 범한 때는,

그들이 이것을 회개하기까지는 그들에게 향하여 언짢은 (reluctance) 낯을 돌려 명백하게 그들의 죄악을 인식(판단)해야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사람이 오인을 몰인정하다든다,

무자비하다고 하여 배척한다면,

그때는 우리들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의 말로서 그들에게 대답해야 것입니다.

'너희가,

만약 여호와께 쓰이는 것을(섬기는 것을)

나쁘게 여긴다면( 엄격한 정의의 하나님을 섬기기를 나쁘게 여긴다면),

너희의 선조가 가장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미의 , 정의 신이든지),

또는 너희가 지금 있는 땅의 아모리인의 신이든지,

너희가 섬겨야 이를 오늘 택하라'.

다만 나와 우리 집은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 쓰이련다(섬기겠노라)'(여호수아24;15)

 

*내촌감삼의 글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