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듭난 삶 2019. 6. 5. 00:08
728x90

믿음으로 얻는 영생

 

: [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복음의 보편성과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은혜틀 받을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것임이 밝혀져 있다.

 

특별히 `사랑' 헬라어 `아가페'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 주도권(主導權)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있다.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사례라 있는 것이다.

 

한편 `주셨으니' `보내다'(send)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말은,

 

성육신(Incarnation)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 뜻인 `아폴뤼미' 요한이 자주 사용한(10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 뜻이 그것이다.

 

또한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 나타낼 ,

 

(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 나타낼 ,

 

(고전 1:19 기록된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 나타낼 등의 경우 에도 사용되었다.

 

(요이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 3: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 의해 이끌리는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but...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 관해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심판은 의로우니라;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

 

(12:48 나를 저버리고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나의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 증거 했다.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재림하실 때에는 분명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로되,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박히시게 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혹은 기타 천재지변(天災地變) 통해서도 심판하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 `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 의미가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다고 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말은 본절에서 `영생을 얻는 '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 뜻인 `소테리아'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것임을 말한다.

 

 

 

[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저를 맏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 앞의 절에서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게 것임을 설명한다.

 

그는 진리를 즐겨 사용하는 논리 전개 방식인 부정과 긍정의 연결을 통해 변증하고 있다.

 

심판 가운데 처해 있으므로 마지막 대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後裔)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속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심판을 받은 -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 정죄된 )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

 

 

 

[ 3:19]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

 

이것이니 - 논리 전개를 강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된 요한의 독톡한 표현을 반영하는 어구이다.

 

(15:12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5:11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 여기 사용된 ''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 의미하는 말로, 본서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빛은

 

'유일한 '(the one light),

' '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1:9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어두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처해 있는 자는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빛이 적극적으로 비춰들 비로소 빛을 인정한다.

 

그러나 빛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빛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따라서 구절은 빛보다는 어두움 하나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19절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다고 하는 소극적 어투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악행' 지적한다.

 

특히 본절은 더욱 죄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성향에 대해 도덕적 이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드러날까 - 이는 '죄를 깨닫게 하다'(convince) '밝히 드러나다', '혐의를 두다', '교정하다'(correct) 등의 뜻을 지니는 ,

 

악을 행하는 자가 죄를 감출 뿐만 아니라,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 3: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진리를 좇는 - 진리 안에서 행하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 신앙의 열매를 맺는 '

 

(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진리'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빛으로 오나니 - 이는 '빛에게로 나아오다' 뜻이다.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起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