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거듭난 삶 2019. 8. 18.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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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피냐 통과냐

 

(EK(에크) APO(아포) 구별)

 

요한복음 12 27 : 지금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때에 왔나이다.

 

ek apo 그리스어(헬라어) 있어서의 개의 전치사이다.

이자 모두 영어의 from 으로 역해야 말인데,

대체의 의미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러나 사이(중간) 상위점이 있다.

 

Apo 단지 '부터' 의미이고,

ek ' 중에서' 역해야 것이다.

 

그리고 상위(difference) 아는 결과로서,

성서의 해석상에 커다란 상위가 생겨 나오는 것이다.

 

예수의 최후의 기도의 1절로서 다음 말씀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 마음이 괴로워(근심스러워) 답답하다. 내가 무엇을 말하랴!

아버지여, 이때(시간)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것인가?

아니, 때문에 나는 이때(시간) 이른 것이다'(요한복음 12;27)라고.

 

만약 1절을 일본역대로 해석하면

예수는 경우에 있어서 죽음을 면하기를 기도한 것이다.

 

'아버지여, 이때에서 나를 건져 주옵소서'라고.

 

지금 이때에 내게 임하려고 하는 고난에서 건져 주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과연 그렇게 기도했을까?

예수는 과연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예수는 과연 십자가를 피하려 했던 것일까?


'아버지여, 만약 가합하시면, 잔을 내게서 떠나게 주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했다고 있으니,

혹은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일절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에서'라는 일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곳에 있어서 '에서' ek인지, apo인지,

연구자는 그것을 분별함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어서는 apo 아니라 ek 사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때 다만 고난에서 건지시옵소서,

고통에서 모면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은 아니다.

이때 (시간) 가운데에서 나를 건지옵소서 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에 나를 인도하신다 해도,

나로 하여금 이기는 바로 되게 하는 없이,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명에 순복하고,

그런 후에 훌륭히 이에 이길 있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십자가를 제거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대하고,

고통에 들어가,

이것을 통과하여,

죽음과 무덤의 저편에 있어서

나를 살리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Ek '가운데서'(중에서)이다. 고통 가운데서이다. 고통을 통과하여서이다.

 

' 시간()에서 건지옵소서'라고 있음은,

'이때에 임한 고통을 통과하여,

그런 후에 가운데서 나를 건지소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할 , 예수의 기도가 아주 마음을 분발시켜주는 것이다.

 

예수는 경우에 있어서 유약하게 그에게 임한 고통에서 면하기를 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에 대처 각오를 하셨다.

그는 다만 십자가가 치욕으로서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죽음에 직면하여 죽음의 삼킨바 되는 없이,

죽음에 의해 마침내 죽음에 이기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수이신 그에게 있어서 적당한 기도이다.

실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이다.

 

'이는 죽음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 , 악마를 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종생 노예 자를 해방시키기 위함에서이다'(히브리서 2;14-15).


예수께서 만약 경우에 있어서 죽음을 면할 있었을 것인가.

우리들 육과 피를 갖추고 한번은 반드시 죽어야 자는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구원 얻을 있으랴.

 

그러나 예수는 물론 경우에 죽음을 면하고자 하신 것은 아니다.

 

그는 '아버지여, 이때(시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아니다.

 

'이때를 통과하고서 후에, 중에서 나를 건져주옵소서'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기도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은 부활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죽어 장사되고 3일에 부활하여, 완전히 죽음에서 구원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예수의 죽음은 죽으심이 아니었다.

죽음의 통과였다.

 

그러므로 이를 일컬어 죽음(thanatos-그리스원어)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탈출(exodos)이라고 한다.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된 변모산에 있어서의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에 있어서 그들


'영광 가운데 나타나, 예수의 예루살렘에 있어서 이미 세상을 떠나시려는 것을 이야기하다' 있는

중의 '세상을 떠나시려는'이라고 있음은 확실히 오역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여기서 예루살렘에 있어서의 예수의 죽으심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 것은 아니다.

그의 탈출(-odos) 대하여 말한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에 맞추어 부활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인이 모세의 지도하에 애굽을 나와서 홍해를 통과(Passing) 것과 같은 일이다.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출애굽(exodos)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행해졌던 것이다.

 

변모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와 상대하여 그의 출애굽에 대하여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9 31절은 다음과 같이 역해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세와 엘리야, 영광 중에 나타나, 예루살렘에서 예수에게 임하려는 탈출에 대하여 말했다'

 

죽음을 세상에서의 탈출로 보고서의 말이다.

경우에 있어서도 ek이지 apo 아니다.

죽음의 기피는 아니다. 통과이다.

 

죽음에 관한 ek 의의는 보다 명백하게 히브리서 5 7절에 있어서 보여 있다.


'그가, 육체에 있을 , 슬퍼하고, 탄식하여, 눈물을 흘려,

죽음에서 자기를 구할 있는 이에게 기도했다..'

 

하나님을 가리켜 '죽음에서 자기를 구원할 있는 ' 칭한 것은,

'죽음을 면하게 하시는 ' 의의는 아니다.

 

여기에 있어서도, '에서' ek이지 apo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음 가운데서 구할 있는 '시다.

 

죽음을 그에게 주시고,

그리고 후에 중에서 그를 건져내시는 이시다.

 

부활의 은혜로서 신앙의 죽음에 갚아주시는 이시다.

 

하나님께서 만약 단지 죽음에서 건지시는 ,

죽음을 면케 하시는 이라고 것인가,

 

그의 독자인 예수마저도 은혜에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서에 '에녹은 있지 않더라'(창세기5;24) 있고,


' 수레와 말이 나타나, 엘리야 대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라'(열왕기하2;11) 있다 해도,

 

그밖에는 사람이 죽음에 조우하지 않고서 세상을 떠났다는 예는 없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다'(히브리서9:27) 있다.

 

죽음은 면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 가운데서 구원되는 것은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예수를 건지셨다.

그리고 우리들 예수께 의지하는 자를 건지시는 것이다.

Ek apo, '에서' '가운데서'(중에서), 말은 간단한 데가 있으나 사이에 천지의 별이 있다.

 

죽음과 이에 따르는 모든 고통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종교의 목적이다.

 

죽음은 단지 이것을 흉사로 알고,

고통은 모두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하며,

이를 면하는 것으로서 기도의 1 목적으로 하는 자는 모두 이교의 신자이다.

 

그들은 애곡유체(wailing) 간구하여 말한다.

 

'원합니다. 죽음에서 건지시옵소서'라고.

 

하지만, 크리스천은,

옳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그렇게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 따라,

 

'아버지여, 죽음을 주셔도 가합니다. 다만 원합니다.

가운데서 구출하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죽음에 이기게 하옵소서

죽음을 통과하여 불사(不死) 생명에 달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죽음에 한하지 않는다.

모든 간난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참된 크리스천은 간난에서 구출되려 하지 않는다.

간난 중에서 구출되려 한다.

 

불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가운데 던져져 가운데서 성결해지기를 원한다.

 

죽음과 모든 간난에 대해서는,

우리는 ek로서 기도해야 것이다.

Apo로서 기도할 것은 아니다.

 

신유라고 하여, 육체의 병의 치유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해득하지 못한 자라고 생각한다.

 

최대의 은혜는 죽음에서 구출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만나 가운데서 구원되는 일이다.

 

나사로는 죽음에서 건져져 다시 죽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죽음 가운데서 구출된 자는 다시 죽지 않는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자에 대해 계시록 기자는 말했다.

 

'이들 위에 둘째 사망은 권세를 취할 없다(계시록20;6)'.

 

Ek인지고, 옳다, ek인지고!

 

*내촌감삼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