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거듭난 삶 2019. 8. 1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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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을 동안에

 

: [ 12:27-36] 지금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소리가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 12:27] 지금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때에 왔나이다 -

 

"지금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것은, 주님께서 그의 인성(人性)에서 그의 당하실 속죄의 죽음을 느끼시고 하신 탄식이다.

 

그는 무죄하신 이로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의 진상(眞相) 보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죄로 물들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서

죄의 결과인 사망의 비참한 진상을 참으로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

 

 

 

[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

 

,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

 

때에 대중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계시(啓示) 말씀(28 ) 깨닫지 못하고 자연계의 뇌성으로 오해하였다.

 

(28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임하였던 하늘의 소리가 역시 동행자들에게 오해되었다. 동행자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있었다고 하였다(9:7).

 

때의 군중은 저렇게 심령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천지를 진동할 능력 있는 복음을 들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것으로 오해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천사의 말로 오해하였으니, 그것을 있는 말로는 셈이다.

그것을 보니, 때에 들린 소리가 무의미한 소리 뿐만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니라, 소리는 예수님 밖에 다른 사람들도 들었으니 만큼, 그것이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 것이 분명하다.

 

 

 

[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소리가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

 

위의 28절의 계시,

 

, "영광스럽게 하리라" (그리스도 죽으시리라는 ),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여기 "너희를 위한 "이란 말씀은, 모를 이상한 소리가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이르도록 함에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이감(驚異感)으로 인하여 신앙에 이르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구절 말씀이 그런 뜻을 가진다고 하기는 어렵다.

 

 

 

[ 12:31] 이제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고난 받아 죽으신 뒤에 나타날 결과를 표시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는 처분되고,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마귀의 계획은 파괴된다.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영적 질서는 오기 시작하여 마침내 만물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 구원이 임한다.

 

(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이르시되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 예수님은 자기의 죽었다가 부활하심이 가져올 구원 운동의 전폭(현재와 미래를 포함함) 여기 진술 하셨다.

 

" 세상 임금"이란 말은 사단을 의미한다.

 

* 참조 (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킨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렇게 그가 속죄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만국에서 그의 모든 백성을 모으신다.

, 만국에서 그를 믿을 자들이 생긴다.

 

희생은 사람들을 끈다. 특별히 흠과 티가 없으시며 전연 허물과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아들의 속죄하시는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실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안에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자기에게로 오게 하신다.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인자는 누구냐 -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이것은,

 

그들이 110:4; 9:6; 7:14등에 근거하여 생각하였을 것이다.

 

(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9:6 이는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것임이라;

 

7: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사야서 53장의 말씀) 몰랐던 것이다.

 

 

 

[ 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 여기 "잠시 동안"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가리킨다.

 

기회라는 말을 들을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며 긴장을 느낄 알아야 된다.

이유는, 기회는 언제나 잠간 동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회라는 것은 사람이 당면한 현재 밖에 없다.

그는 미래를 자기의 시간이라고 없다.

미래는 그에게 감취어 있다.

그것이 그의 것이 수도 있고, 혹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할 수도 잇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받은 기회는 현재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회를 잠간 동안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

 

청년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지금 준비하는 시기이고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부나 가지고 다음이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뒤에 신앙생활을 바로 보겠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생각이다.

청년들은, 준비하는 중에도 준비가 역시 정규적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준비가 바로 살림이다. 그러므로 때에도 하나님 없이 살지 말아야 된다.

다음에 믿겠다고 하는 것은, 다음에도 잘못 믿을 것을 약속함과 같다.

 

노인들은 낙오자의 심리를 가지고 기회를 허송하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노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을 좋은 환경에 처하여 있다.

그들은, 평생 모든 것을 지내보고 헛된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말로 당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만하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 70 때에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크랜멀(Cranmer), 60 때에 비로소 복음 진리를 크게 깨닫고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구절과 다음 구절에 ""이란 말이 다섯 나온다.

 

여기서 ""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36절에 말하기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빛으로 비유하였을 때는 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지으셨으니, 그것을 보아도 빛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있다.

 

빛이 없는 세계에는 생명이 없다.

 

슐라텔(Schlatter) 말하기를,

 

"생명은 존재보다 높고, 빛은 중에도 가장 높다. 이유는, 그것이 생명에게 깨닫는 내적 성정(內的性質)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Hoher als das Dasein ist die Lebendigkeit, und das Hochste ist das Licht, womit dem Leben die bewusste, enkennende Innerlichkeit verliehen ist. - Der Evangelist Johannes, p.6).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여주시는 빛이신가?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실 때에 어떤 이론에 의하여 보여주시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보여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실 때에는 하나님이 환하게 우리에게 알려진다.

 

슐라텔(Schlatter)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교훈에서 교훈을, 또는 신학에서 신학을 해설하시는 이가 아니다. 그는 빛으로 역사하신다"라고 하였다.

(Er hat nicht Lehre durch Lehre, Theologie durch Theologie ersetzt. Er wirkt als Licht. - Der Evangelist Johannes, p. 273).

 

그리스도는 자신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참으로 접촉하는 자마다 참되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보다 귀한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있는 기회처럼 중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보다 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전파할 때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20:24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원인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라고 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제일주의로 살아야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된다.

 

루터(Luther)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영혼을 구원하게 하여라" 하였다.

 

 

 

[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