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불멸의 안중근

거듭난 삶 2009. 10. 2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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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안중근 동아일보

 
 
하얼빈에 울린 총성, 2000만 조선인 가슴에 더 큰 울림으로
일제요인 암살- 관공서 습격
독립투사들의 ‘롤모델’로
안의사 일가친척 망명투쟁
건국훈장 받은이만 10여명

《“모처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긔() 안모는 녯날 하루빈에서 일본 정객 이등박문을 총살한 안중근 씨의 친척이요 또 로국()에서 평양에 드러온 이래 중화군과 기타 각디를 수차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야 무삼 일을 계획하는 듯함으로 이미 중화경찰서에서도 그 련루자로 청년 이삼인을 검거하고….” ―동아일보 1924년 8월 4일자》
일제 조선침략의 설계사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살해한 사건은 2000만 조선인의 가슴속에 큰 격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내내 수많은 항일독립투사들이 그를 역할모델로 삼았고 일제 요인 암살이나 관공서 습격 등으로 그의 길을 따르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다.

1926년 4월 28일 독립운동가 송학선()은 순종의 죽음을 조상()하러 오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차량을 습격해 경성부회 의원 세 사람을 살해했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은 그 차에 타고 있지 않았다. 체포된 송 의사에 대한 일경의 취조 결과는 5월 2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세종로에 되살아난 애국혼
100년 전 오늘, 대한국인() 안중근 청년이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외치며 일제의 화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했다.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세종로 KT 광화문 지사는 안 의사의 왼손을 그린 대형 걸개그림을 외벽에 내걸었다. 김재명 기자
“범인은 항상 할빈(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숭배하고 잇던 터임으로 재등() 총독을 자살(·찔러 죽임)하기로 결심하고 그전부터 신문이나 혹은 기타에서 총독의 사진을 보고 용모를 알어두엇든 터인데….”

안 의사를 경모하고 그의 길을 따른 인물 중에는 특히 그의 일가친척이 많았다. 의거 직후 대부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 등 해외로 이주했기 때문에 활동이 자유로웠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수시로 동아일보 지면에 전해졌다. 안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씨가 재상하이 대한적십자사 사장(총재)에 취임했다는 1922년 2월 5일 기사, 상하이 한인교민단장 여운형이 안 의사의 또 다른 동생 안공근 씨를 후임으로 지명했다는 1926년 2월 20일 기사 등이다.

1929년 4월 25일 동아일보에는 망우리에서 우편물 운송차량을 탈취한 뒤 1주일이나 일경과 격전을 치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공명단()사건 소식이 실렸다. “공명단원 세명이 경긔도 경찰부에 톄포되어 엄중취됴중이라 함은 긔보()하얏거니와 동()단본부단장과 뎡확한 단원수효는 아즉까지 확실치 못하나 상해지부장은 안화명()이라는 이등박문공을 하루빈에서 암살한 안중근의 재종제(·6촌 동생)라 하며 출생디는 황해도 송화인데 십여 년 전에 조선을 떠나 중국 각디는 물론이오 멀리 미주와 구라파의 독일 로서아 등 제국을 순회하며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십여 년 전부터 경찰 측에 주목의 초y이 되였다더라.”

안 의사의 사촌 명근 씨는 안 의사 의거 이듬해인 1910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수많은 민족지도자가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받았던 ‘105인 사건’의 발단이었다. 1924년 그의 석방은 전 조선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경술년 십이월 입감 이후로 꼿 피고 낙엽 지는 전후 십오개년을 경성형무소 텰창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지난 구월에 광명한 텬디에서 정든 산천과 사랑하는 동포를 보게 된 안명근 씨는 (…) 신천 시내 유지 일동은 유량한 양악을 선두로 하야 산자수명한 화산에서 다과회를 개최하려고 하얏스나 당국의 엄금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1924년 4월 15일 동아일보)라는 기사는 당시 석방된 안명근 씨에 대한 조선 사회의 기대가 한껏 높았음을 보여준다. 안 씨는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오늘날 국가보훈처가 펴낸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안중근 의사를 포함해 그의 일가친척으로 독립장 등 대한민국건국훈장을 받은 인물만 10여 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동생 정근 공근 씨, 사촌 명근 경근 씨, 조카 춘생 봉생 씨 등이 그들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100년 앞을 내다본 ‘동양평화론’▼
■ ‘동아시아 공동체’ 재조명



두 동생에 유언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 안 의사가 동생인 정근, 공근과 홍석구 신부를 만나 유언을 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평화를 교란했다. 러일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 유지’라는 명목을 내걸었지만, 한국 황제를 폐위하는 등 당초의 선언과 반대되는 결과만을 초래해 2000만 한국 국민 모두를 분개시켰기 때문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청년 안중근은 의거 나흘 후 하얼빈의 일본 총영사관에서 열린 첫 신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이토 공작을 왜 적대시하는가’라는 검찰관의 질문에 이토가 을사늑약을 부당하게 체결한 점, 한국 보호라는 명목으로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내통해 한국에 불리한 정치를 하고 있는 점 등 15가지의 이유를 대며 동양평화를 해친 이토의 죄를 성토했다.

안 의사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과 사형 집행을 앞둔 극한 상황에서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도와 문명국가를 건설하고 동양평화를 이룩하자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모두 다섯 부문으로 계획했지만 서문과 각론의 일부분만 쓰고 나머지 세 부문은 완성하지 못했다. 이토나 중국 이홍장의 자국 중심 동양평화론과 달리 안 의사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처럼 ‘진정한 평화는 동등한 입장의 조약에서 나온다’고 주창함으로써 100년 뒤 세계화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되새겨야 할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평화 이룩해야

안 의사는 옥중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의 역사’(응칠은 안 의사의 아명)와 ‘동양정책-동양평화론’, 법정진술 등에서 자신의 의거는 동양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출발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으로 규정한 그는 뤼순감옥 수감 중 일본 관헌에게 전한 ‘안응칠의 소회’에서 “하얼빈에서 총 한 발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라고 밝혔다.

안 의사는 △뤼순 지역에 한중일이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인도 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켜 나가자 △한중일 삼국이 참여하는 공동 금융기구를 설치해 운영하자 △한중일 삼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어 삼국 청년들로 하여금 군단을 편성해 지키게 하자는 구체적인 구상도 밝혔다. 공동 금융기구 계획은 유럽연합(EU) 구상보다 최소 70여 년을 앞서는 진보적 구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이익 공동체와는 차원 다른 구상”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동양평화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마키노 에이지 일본 호세이대 철학과 교수는 26, 27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의의’ 발표문에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숭고한 이념은 최근 일본의 정치권에서 나오는, 이익 공동체를 추구하는 ‘동아시아공동체’와는 차원이 다른 구상”이라고 평가했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26일 중국 다롄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서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본 안중근과 동양평화론’을 발표한다. 그는 “당시 나온 동아시아 구상의 대부분은 입으로 동아시아의 연대와 단결을 외치면서도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우선하는 폐쇄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이와 달리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보편 세계로의 지향을 가진 열린 민족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서울-하얼빈서 오늘 ‘영웅’을 기린다
기념식 등 국내외행사 다채▼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민족혼과 동양평화 사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국내외에서 열린다.

26일 중국 하얼빈 시 조선민족예술관에서는 한국 독립기념관이 하얼빈 시의 도움으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연다. 기념상영물 상영, 유시 낭독, 동상제막식 등이 이어진다.

서울에서는 오전 10시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광장에서 정부 주요 인사와 안 의사 유족 등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거행한다.

천주교 다롄 한인 성당을 중심으로 한 한중일 천주교인들은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묵주기도를 인터넷 카페(CAFE.DAUM.NET/TIANZHUJIAOTANG) 댓글 형식으로 봉헌하는 ‘묵주기도 100만 단() 바치기’ 운동을 내년 3월 26일까지 벌인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200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 오늘의 역사
작성일 2009-10-26 09:35:53 조회 20,674
200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 오늘의 역사

1909년 10월 26일 -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일본에서는 영웅이지만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최대의 원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1905년 이후 조선 식민지 계획을 착실하게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군중의 틈에 숨어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린 후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지나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총 3발을 쏴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다. 또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하얼빈 천상 총영사, 삼 비서관, 전중 만철 이사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저격 당한지 약 30분 뒤인 오전 10시경에 사망했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후 만주 뤼순 감옥에 갇힌 뒤 재판을 받았다. 안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을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고 강조했다. 하얼빈 거사를 군인의 신분으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규정하며 자신은 독립군이 적국의 수장을 사살한 것이기 때문에 포로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재판과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순국했다.

1950년 10월 26일 - 국군 제 6사단, 압록강변 초산에 도착

국군 제6사단이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착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 시킨 지 40여일 만이다. 10월 1일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한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은 동부전선으로 진격해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하였고 17일에는 함흥에 도착했다. 중부전선에서는 한국군 제7사단이 10월 21일 평양북방 순천, 제8사단이 10월 23일 덕천에 도착한 사이 제6사단이 선봉에서 10월 26일 국군과 연합군 최초로 압록강 국경선상의 초산에 돌입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 충남 삽교호 방조제 준공

삽교천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의 하나로 계획되었던 삽교로 방조제가 1979년 10월 26일 준공되었다. 이날 열린 준공식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 전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공식행사로 기록됐다.
삽교호 방조제는 충남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와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 사이에 축조된 방조제로 길이 3,360m, 최대너비 168m,높이 12∼18m이다. 이 담수호의 조성으로 4개 시군 농토의 관개용수가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업·생활용수 하루 4만 8000t 공급도 가능하게 됐다. 또한 방조제 도로의 이용으로 서울∼당진 간 육로 거리가 40여km 단축되는 간접 효과도 거두게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피살

박정희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현장에서는 차지철 경호실장 등 5명도 함께 숨졌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5월 24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16군사혁명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1963년 제5대부터 1979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17년 동안 대통령을 역임했다.

1997년 10월 26일 - ‘국민승리21’ 창립. 권영길 민주노총위원장 대통령후보로 추대

진보적 대중정당을 표방하며 현 민주노동당의 모태가 된 ‘국민승리21’이 1997년 10월 26일 창립대회를 갖고 권영길 민주노총위원장을 대통령후보로 공식 추대했다. ‘국민승리21’은 이날 창립선언문을 통해 “보수경쟁을 일삼는 기성정치 세력을 물리치고 참된 개혁과 진보의 정치를 펼 때 정권교체와 세대교체를 뛰어넘는 진정한 세력교체를 이룩할 수 있다”며 “이번 대통령선거를 통해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의 토대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이어 권 후보는 연설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정치의 주인으로 나설 때 우리의 21세기는 희망일 수 있다”며 “21세기 사회복지 대혁명을 이뤄나가겠다”고 말했다.

2003년 10월 26일 - 북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 사망

북한 노동당 김용순(金容淳) 대남담당 비서가 2003년 10월 26일 사망했다고 북한 관영 중앙방송이 27일 보도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이날 ‘부고’에서 “김 비서가 6월 16일 교통사고로 장기간 입원치료를 받아오다가 26일 오전 5시에 69세를 일기로 서거했다”고 밝혔다.
중앙방송은 부고에서 “김 비서가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의 기치 아래 조국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는 데 온갖 정열을 바쳤다”며 “당과 혁명, 조국과 민족 앞에 세운 그의 공적은 길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평안남도 평원 출생인 김 비서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당 통일전선부 부장,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왔다.

2003년 10월 26일 - 현존 최고(最古) 조선 청화백자 묘지석 발견

연대가 확인된 조선시대 백자 중 가장 오래된 청화백자 묘지석이 발견됐다. 고려대박물관은 2003년 10월 26일 “경기 파주시 교하읍 파평 윤 씨 정정공파 묘역 유물을 조사하던 중 세조의 장모인 인천 이 씨의 청화백자 묘지석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묘지석에는 세조 2년(1456년) 7월 14일 인천 이 씨가 숨졌으며 10월 8일 매장했다는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등이 적혀 있어 1456년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가 확실한 조선 백자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경남 진주시 정씨 묘에서 출토된 ‘백자 상감 묘지석’(1466년·국보 172호· 호암미술관 소장)이며 청화백자로는 홍치(弘治) 2년 연대가 쓰인 청화백자 항아리(1489년·국보 176호·동국대박물관)가 있다. 이번에 발견된 청화백자 묘지석은 이들보다 10∼30여년 앞선 국보급 유물이다.

2006년 10월 26일 - 프로레슬링 “박치기 왕” 김일 타계

‘박치기 왕’ 김일 씨가 2006년 10월 26일 낮 12시 17분경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77세. 공식 사인은 만성신부전증 및 심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의료진은 밝혔다.
프로레슬링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고인은 1960, 70년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그는 1967년 세계레슬링협회(WWA) 제23대 세계헤비급챔피언에 오르는 등 30년간의 현역 생활 동안 20차례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땄다. 그러나 1989년부터 긴 투병 생활을 해 왔고 1994년부터는 을지병원의 도움으로 병실에서 생활해 왔다.

구성/편집 이철 동아닷컴 기자 kino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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