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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국의 수호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거듭난 삶 2009. 11. 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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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수호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이 오늘(2009.10.26) 서울과 중국 하얼빈에서 동시에 개최됐습니다.
서울에서는 오전 10시 남산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 광장에서 정부 인사와 광복회원, 시민 등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공연, 기념사, 독립군가 제창, 만세삼창 순으로 기념식이 진행됐습니다.
특히 손녀와 증손자 등 국내외에 거주하는 안 의사의 유족 17명이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참석자들은 기념식을 마친 뒤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축 현장을 둘러보고 공사 관계자들을 격려했습니다.
당시 의거 현장인 중국 하얼빈에서도 독립기념관과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공동 주관으로 광복회원과 동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으로부터 처형된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의 상징인 히토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역에서 권총으로 암살한 위대한 대한민국 조국의 아들 이었읍니다 . 권총 7발을 발사하여 3발중 2발은 어깨 아래 관통 ,1발은 가슴 관통을 하여 , 대한민국의 원흉  히토히로부미는 사망을 하였읍니다. 

 

나머지 4발은 수행원  4명이 각각 맞았읍니다.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 원수를 향해 총탄을 날린 안중근의사 가족 사진 입니다  본인의 목숨보다 대한민국 조국을 더 사랑했던 안중근 의사 ^^* 그래서,,  우리 국민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으로 순국하신후 가족들은 엄청난 어려운 생활을 하였을것 입니다. 맨 왼쪽 아이를 안고 있는 분이 안중근 의사 아내 ( 아내 이름 : 김아려 여사) 입니다. 엄마품에 안긴 아기가 안중근 의사 아들( 큰아들 이름 : 안 분도) 입니다 . 둘째아들 : 안 준생 맨 오른쪽은 안중근 의사 딸 ( 딸 이름 : 안 현생)  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녀를 2남 1녀를 두었읍니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정부로부터 사형으로 순국 되신후 아내 김아려 여사는  2남1녀를  데리고 중국 연해주로 이주를 하였읍니다.  그러다가 안중근 의사의 큰 아들 안분도는 이국에서 12살에 세상을 떠났고 김아려 여사는 살아있는 자녀 두명을 데리고 상해로 거주지를 옴겼읍니다. 광복후 대한민국으로 귀국을 하였지만 둘째 아들마져 1953년에 세상을 떠났읍니다.

 

안중근 의사의 둘째아들 준생은  정옥녀 씨외 결혼하여 자녀 1남2녀가 있읍니다. 아들: 안웅호 , 딸 안선호 ,아들 안연호 정옥녀 여사는 남편이 타계한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손자인 안웅호씨는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외 안중근 의사의 외손녀는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안중근 의사 가족을  우리 국민 모두는  존경해야하며 가족 모두는 우리 국민이 적극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읍니다.  

 

안중근 의사의 장녀 안현생 여사의 무덤이 깡마른 봉분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다 ( 강북구에 소재)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쏘아 올린 6발의 총성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을 거쳐 나라가 망국(亡國)의 낭떠러지에 몰려 있을 때 이 민족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였다. 안중근 의사 의거는 이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윤봉길·이봉창 의거, 해외 독립군으로 이어지면서 칠흑같이 어두웠던 일제(日帝) 치하를 밝히며 민족운동에 희망과 용기의 불을 지폈다.

안중근 의사는 세계 각국이 제국주의를 추구하고 모방하면서 이전투구를 벌이던 100년 전, 민족을 넘어 인류 공동체의 평화를 염두에 두었던 선각자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후 법정에서 '이토의 죄(罪)' 15가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를 들었다. 이토의 죄가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 외교권을 빼앗고 정미7조약을 통해 내정을 유린한 것만이 아니라 힘으로 이웃 조선을 강제합병하려 함으로써 결국 동양평화를 위협한 것이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날짜를 받고 며칠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날들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약육강식을 넘어 공동번영을 모색하는 길을 추구하는 저술에 쏟아부었던 사람이다.

안중근 의사는 미완성 원고인 '동양평화론'을 통해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의 이치"라고 전제한 뒤 19세기 이후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동아시아를 지키려면 한·중·일 3국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에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동양평화회의를 설치할 것, 3국 공동 은행을 만들어 공용 화폐를 발행할 것, 3국의 젊은이로 공동 군대를 편성하고 상대방의 언어를 가르칠 것, 한국과 청나라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앞서 있던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 발전을 꾀할 것 등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안중근 의사의 구상 속에 싹텄던 '동아시아공동체론'이 100년이 흐른 지금도 여물지 못하고 있고 한·중·일 공동 역사교과서 편찬, 한·중·일 FTA 체결 등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안중근 의사의 역사를 내다보는 시야(視野)의 광대함과 시대를 선취(先取)하는 예견력(豫見力)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 내놓았던 '동양평화론'의 정신과 제안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 번영과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느냐는 한·중·일 3국이 지난 100년의 뼈저린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과 그 교훈의 실천 의지에 달려 있다.

50년 전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의 유럽합중국 구상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유럽경제공동체(EC)를 거쳐 유럽연합(EU)이란 열매를 맺었다. 이토 히로부미 100주기인 올해 일본 정부는 기념메달을 만들었고 이토의 고향인 야마구치현이 속한 중부우체국에선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역사관의 상극(相剋)이란 이런 현실의 벽에 부딪혀 여태 선각자의 사상으로만 머물러 있는 동아시아의 오늘이 안타깝다.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어제 KBS 열린 음악회에서는 안중근의사 의거10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방영하였다.

모처럼 공영방송다운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흐뭇했다.

전 국민들이 시청하는 방송에서 독립투사들의 모습을 다시 재현케 하여 잊혀져가는 안 의사의 순국정신을 기르게 해주었으니 참 잘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역 플랫폼을 내려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 권총 3발로 살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안 의사는 러시아검찰관 예비 심문에서 거사동기를 묻자 “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 의용군 사령관으로 총살하였다고 ” 밝혔다.

 

   안 의사의 의거가 전 세계에 알려지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서양에서까지도 그의 영웅적인 애국심에 감탄을 하였고 대한민국 건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서거한지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는 심지어 일본에서도 안 의사의 애국정신과 숭고한 평화주의자로서의 인격에 감동되어 사당을 모시고 승모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천주교신자로서 교육자로서 또는 의병활동의 군인으로서 성실한 삶을 살아오면 적까지도 용서하는 넓은 포용력을 간직한 한학자였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그의 내면과 세계관을 드러내었다.

 

  그는 감옥에서 틈틈이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을 비롯한 200편의 유묵(遺墨)을 남겼는데 특히 유목에는 단지(斷指)하나가 없는 손바닥으로 낙관 대신 장인(掌印)을 찍었다.  작품마다  대한국인안중근(大韓國人安重根)이라 서명했다.

200편중 20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글씨에는 장렬한 최후를 앞둔 애국지사의 충일한 기개와 강한 의지가 배어 있으며 필치가 힘차고 활달한 것이 특색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영혼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점이다. 국가보훈처를 비롯한 유족 보존회 측에서 심지어 북한에서 조차도 중국뤼순 감옥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유해발굴에 애를 써보지만 아직도 유해를 발굴하지 못하고 구천에서 영혼이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원하던 독립된 조국에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안 의사의 유언을 생각하면 미지근하게 대응하는 일본정부의 처사에 분통이 터진다. 마침 국가보훈처에서는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에 대비해 미국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안 의사 손자의 머리카락에서 DNA샘플을 채취했다니 다행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도 기어코 안 의사의 유해를 범정부적 차원에서 찾아내어 동작동 국가묘지에 안장시켜서 그 유언을 실현시켜야 하겠다.

역사교육에서도 안 의사의 의거가 대한민국의 아들로서 민족혼을 세계만방에 알린 위대한 거사라는 점을 인식시키고  그 정신을 이어받음은 물론   학생이나 관광객들에게 하얼빈과 뤼순감옥을 역사현장 탐방 코스로 개발하여 독립정신을 앙양 시켜야 하겠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실내 전시실과 안중근의사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내 전시실은 안중근의사 일댁, 하얼빈 의거, 재판과정 등

 

을 다룬 영상물과 옥중생활 모험, 활약상을 다룬 슈퍼그래픽, 유묵등을 통하여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위업을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꾸

 

며져 있다. 안의사 광장에는 안의사의 인품, 기개, 사상을 느낄 수 있는 동상과 어록비 등이 전시 되어 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하절기(3월 ~ 10월) 9:00 ~ 18:00
동절기(11월 ~ 2월)9:00  ~ 17:00
휴관일 : 설. 추석휴관


입장료
개인 : 일반 1000원 / 학생 700원
단체 : 일반 700원 / 학생 500원

 

 

안중근의사 기념관

오시는길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살신성인

 


출처 : 國家와 民族을 ♡하는 老宿者 입니다.
글쓴이 : 老宿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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