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이사야서를 공부하기 위해서

거듭난 삶 2021. 12. 2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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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연구의 필요

 

데살로니가 후서 21-12 : 형제들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가 그분께로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2) 너희는 영으로나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왔다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

3)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4)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

5)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이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너희가 기억하지 못하느냐?

6) 너희는 그가 그의 때에 드러나게 하려고 무엇이 저지하고 있는지 지금 아나니

7)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으나 다만 지금 막고 있는 이가 길에서 옮겨지기까지 막으리라.

8)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나리니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

9) 그 사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11)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12)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 모두가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신앙은 속(심령)이요, 또 밖이다.

눈에 보이는 밖(외부)인 것의 증명에 맞추어(합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속(심령)인 성경(聖經)의 승인 있을 때,

확고부동인 신앙이 있는 것이다.

 

신앙이 속에만 있을 때 신비화 하고,

꿈 같은 것이 되어 꺼져 버리기 쉽다.

또 밖에만 있을 때 천박하게 되고,

정치, 경제와 같은 것으로 되어,

이 세상의 세력으로 화할 위험이 있다.

 

신앙도 역시 건전한 신체와 같이 두발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외부)의 역사와 천연과,

(심령)의 확신과 도()의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가하고 살피건데,

신앙이라면 심령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보통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의 필요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야 말로

신앙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인 이상,

보지 않고서 신앙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만약 보지 않고서 신앙이 생기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육체를 취하여, 사람 사이에 나타날 필요는 없었다.

하나님은 또 만물을 만들지 않고서 곧 영혼을 구원하셨으리라.

 

사람은 무언가 필요 있어서 육체를 받았을 것이고,

하나님은 무언가 이유 있어서 눈에 보이는 만물을 지으셨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도 또한 하나님을 닮아 영인 까닭에,

이 둘 사이에 순연한 영적 교제가 행해짐을 의심 않는다 해도,

그렇지만 영은 서로 사귐에 사물에 의한다.

 

사람은 천연을 통하여,

천연의 하나님께 접하고,

섭리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다.

 

세상에 순 영적이라는 것은 없다.

영은 반드시 사물로서 나타나고 사물 내에 영이 역사한다.

순 신앙이라고 하여, 우주, 인생에서 떠난 신앙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고 하면 구름이나 연기마냥, 신뢰하기에 족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건전한 신앙에 내외의 양면이 있다.

속으로 믿고, 또 밖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밖에도 또한 양면이 있다.

천연과 역사이다.

천연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의 총칭이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행하시는 도정이다.

 

천지 만물과 날마다의 되는 일(사건),

신앙은 이에 관련하는 것으로

이것으로써 양육되고, 강화되며, 인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지한 목사, 전도사처럼 그저 믿으라고,

땅을 보이시며, 세계 인류의 성행에 비추어,

우리들에게 신앙을 권하신다.

 

크리스천의 신앙은 신앙만의 신앙이 아니다.

대 우주, 대 세계를 참고로 하여 선 신앙이다.

 

우리는 지금 천연에 대하여 논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하여 말한다.

역사는 세계의 된 일(사건)이다.

소위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다.

신문은 현재의 사건이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세계에 생기고, 또 생기고 있는,

그리고 생기려는 모든 사건(될 일)을 편리를 위해 총칭하여,

역사라고 한다.

 

그리고 신앙의 입장에서 보아,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뜻의 나타남(현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나,

먼저 예언자(선지자)로써 이것을 미리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 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모스서 3:7 한글 개역)고 있는 대로이다.

 

역사는 예언의 실현이다.

정당하게 예언을 해석할 때 역사를 알고,

역사에 있어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일하심)를 본다.

 

그러므로 성서는 일서는 아니다. 삼서이다.

성서와 천연과 역사이다.

그리고 역사의 열쇠가 예언이다.

우리들은 예언에 의해,

역사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가고 살피건데,

지금의 그리스도 신자는,

그 실제적 신앙 생애에 있어서,

예언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을 심령의 일로만 생각하고,

그 강한 증명을 이 세상의 사건에서 보지 않는다.

 

성서는 분명히 신앙 양성 위해,

예언의 필요 불가결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신자들 전체는 예언 제외의 성서에 의해

그 신앙을 키우려 하고 있다.

 

이는 실로 그들의 신앙이 언제나 미약하고, 불안정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사도 베드로의 말이 특히 적절하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베드로후서 1:19 한글역).

 

예언으로써 신앙을 돕는다.

이는 신앙을 견고히 하는 최선의 길이다.

예언 연구를 게을리 하고서, 신앙은 성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많은 예언을 주셨다.

성서의 대부분이 예언이다.

구약뿐 아니라, 신약까지가 특히 예언서이다.

 

예언 없이 신앙을 키우려고들 한다.

그것이 불구의 신앙으로 끝남은 의심할 바 못된다.

 

그리스도교가 진리인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세계 오늘의 상태에 있어서이다.

 

이 파멸에 처한(직면한) 문명의 세계,

이것은 성서가 예언하는 대로인 것으로서,

신자의 구원의 희망은, 이 암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존속과 절리시켜 논할 것이 아니다.

유대민족 없을 것인가?

그리스도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짐무덴노보다 다시 2천 년 전의 옛날,

신앙의 시조 아브라함으로써 생긴(일어난) 민족은,

20세기의 오늘, 역시 의연히 존재하고,

세계의 대세력으로서,

사상, 실제의 제 방면에 있어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대 세계의 무대 위에,

국가의 흥폐, 국민의 성쇠로, 그 뜻을 나타내 보고 있다.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예언 연구이다.

 

*내촌감삼의 (19304'성서지연구')를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