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engol 2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거듭난 삶 2022. 7. 5.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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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고난)에 이기는 길

 

이사야서 534~6: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한글 KJV)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는가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이사야서 53:4~6 한글 개역)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예레미야 애가 1:12 한글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한글 개역)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괴로움이 있습니다.

 

괴로움은 빈자에게도 있습니다.

부자에게도 있습니다.

하류사회의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상류사회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애써 공부해도 괴로움에서 면제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세상에 괴롬이 덜한(적은) 사람은 있대도,

최대의 고통인 죽음을 면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은 괴로움의 장터(동네)입니다.

고난은 만인 공통성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고통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해서 고난을 피할까하여,

여러 가지 공부를 합니다.

 

어떤 고난은 이것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고난은, 이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인력 이상의 힘에 기대려 합니다.

신불에게 기원합니다.

혹은 비전을 전수받아, 악마를 쫓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여전히 남습니다.

문명 진보의 오늘일지라도,

이 세상은 예전과 다름없는 눈물의 골짜기입니다.

 

여기서 고난을 제거하는 다른 방법을 발견치 않으면 안 됩니다.

고난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견딜 수는 있습니다.

 

죽음은 이것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견디고,

이에 이김의 능력을 공여 받아,

죽음은 폐지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됩니다.

 

그리고 참된 종교는,

이 힘을 공여 받아,

고난과 고난의 왕인 죽음을 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은, 이것을 모릅니다.

 

보통(대개)의 사람은,

하나님은 고난 그것을 제거하여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께 기원을 정성 다해 드리다가

고난이 제거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없다든가,

있어도 사람을 도울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만물을 주재하시는 하나님께 사람의 고난을 제거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사람이 기도에 응답하여, 고난을 없이 하십니다.

병을 고치십니다.

파도를 잔잔케 합니다.

사자(死者)까지도, 부활케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보통의 경우에 있어서는,

소위 천연의 법칙(64p 역주 참조)이 행해져,

고난은 고난으로서 실현합니다.

 

그러므로 불신(不信)의 사람은 의문을 일으켜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어찌하여 고난이 있는가,

하나님이 만약 하나님이시라면,

고난은 곧 이것을 없이 하실 것 아닌가고.

 

하나님은 확실히 계십니다.

 

고난도 또한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폐하지 않고서 이에 견디고

더 나아가 이것에 이김이 힘(능력)을 주시어,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시고,

 

사람은 또 기이하신 힘(능력)의 공급을 입어,

하나님의 실재를 실험(체험)하며,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에 접촉한 그 행복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이것을 없이 하여 주지 않으셔도 좋은 것입니다.

이에 견디고,

이에 이김의 힘(능력)을 주시기만 하면,

없이하여 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니 속()에 견디는 힘을 주시는 것은

밖으로 고난을 없이 하여 주시는 것보다

훨씬 이상의 은혜입니다.

 

고난을 제거 받는 때,

곧 하나님을 잊어버림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을 이길 힘을 받을 때,

우리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바(성전) 되는 것으로,

인생의 행복 이 이상 없는 것입니다.

 

만약 고생한 것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난은 인생 최대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는,

이 행복을 실험(체험)하고,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에 이기는 힘(능력),

그저 막연하게 신자의 마음에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를 가져오는 위안자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난 후,

새롭게 친구를 얻는 것입니다.

 

다만 이 세상의 동정자를 얻는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친구로 하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는,

그가 사람 가운데서 가장 많이,

가장 세차게, 가장 깊이 고난당한데 있습니다.

 

그 자신이 예언자의 입을 가지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그 고난 같은 고난은 또 세상에 있을 것이랴(예레미야 애가 1:12 참조).

 

겟세마네 동산에 있어서, 그의 고난은 극에 달하여, 그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도다’(마가복음 14:34 참조).

 

또 땅에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기를,

 

만약 뜻에 합하시면 이때를 지나가게 하옵소서’(마가복음 14:35)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를 읽는 이는,

모두가 그 분이 사람가운데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음을 압니다.

 

하지만 이분이 동시에 또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음을 알고서,

인생의 고난이 결코 하나님의 형벌로서 임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고난당할 때 그것을 아는 것만이 커다란 위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그것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거룩하신 분이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멍에를 메라는 것은, ‘멍에를 함께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소위에 놓이는 것으로서,

멍에를 함께 한다는 것은,

두 사람으로서 하나의 멍에를 메는(지는) 일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동사자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43절에 동역자라고 있음은, 이것을 말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피곤해진 자, 또 무거운 짐 진 자여, 나와 멍에를 함께 하자

나는 너와 함께 한 가지로 멍에를 목에 걸고, 네가 끄는 무거운 짐을 끌련다’(대의).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 나란히 하여 함께 멍에를 그 목에 걸고,

내가 끌어야 할 짐을 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거운 짐은 이미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너희 마음에 안식을 얻으리라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와 나란히 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져 주십니다.

 

이자 어느 것이 복(행복)이겠습니까?

물론 후자입니다.

 

고난당한 결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동역자가 되었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와 멍에를 함께 하여,

무거운 짐이 가볍게 될 뿐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그에게서 배우고 그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듯,

우리도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멍에를 함께 하여,

우리들의 완강히 쳐부수어 집니다.

우리들의 오만이 낮추어 집니다.

 

두 마리의 소는 동등한 힘에, 동양의 성질이 아니면,

잘 동일한 멍에에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한 멍에를 메기에 이를 때,

우리 각자도 또 그와 힘(능력)과 성질을 같이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하여, 고난은 이것을 없이 해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하나님의 아들의 동역자로 되고,

그와 고난을 함께 하여,

그의 능력의 공급에 참여하고 싶어집니다.

 

이같이 하여,

고난은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 의해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되기에 이릅니다.

육에 있어서 죽고, 영에 있어서 살기에 이르게 됩니다.

즉 영생을 자기 것으로 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 때,

고난이 인생에게서 끊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고난이 없는 세계,

그것은 실로 견딜 수 없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독자로서 우리들과 함께 고난을 분담해 주심으로써,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난은 이를 없이 하기를 원치 않고,

이에 견디며,

또 이기는 길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음을 믿습니다.

 

*내촌감삼의 주석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