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
요한복음 9장 18절-23절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 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 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믿음은 마치 눈을 뜨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전혀 깨달을 수 없었던 것들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면 의심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의혹의 눈길들이 신뢰의 눈길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토록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든든한 財力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어쩌면 믿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믿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남을 날마다 의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믿음의 비밀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국은 入養兒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여기 이목사도 두 번째로 미국을 갈 때 (공짜비행기 티켓의 유혹 때문에) 3개월짜리 갓난여자 아기 둘과 7세의 남자아이들 셋을 를 데리고 New York공항에서 양부모들에게 전해 주었던 죄인이랍니다.
한국의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피부 색깔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부모들에게 입양됩니다. 많은 사랑과 좋은 文化的인 혜택을 누리고 자라지만 서서히 자신들이 그들의 양부모님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때부터 그들의 밤은 원망과 그리움 등의 눈물로 채워지곤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조디 러셀입니다. 그녀는 5살 때 미국으로 입양되어 갔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다가 고아원을 통해 대니얼과 패티 러셀부부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독실한 基督敎 家庭에 입양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을 받지만 그녀는 다른 입양아들과 마찬가지로 청소년기에 자신의 아이덴티티, 자신의 뿌리,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 헤메게 됩니다. 가족들과 친구들 앞에서는 활발하게 지내다가도 밤에 홀로 침실에 들어가서는 헤아릴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친 어머니가 그리워지면 질수록 자신이 이 가정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나이 16세가 되던 해에 홀로 침실에서 눈물로 자신의 모습과 뿌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다가 정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고, 입양되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믿음의 삶이 시작된 이후, 믿음의 눈이 열리고 난 후 에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겨진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藝能 쪽에 才能을 가진 그녀가 마침내 音樂을 전공하고 아시안 어메리칸 싱어가 될 꿈을 가지고 LA로 가서 리코딩 회사를 세웁니다.
명칭은 KPC(Korean Princess in Christ) 지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한국 공주"라는 이름의 회사입니다. (이 이름은 입양당시의 그녀를 보고 양어머니가 지은 Korean Princess라는 詩의 題目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명칭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그 분이 왕이 되시는데, 그러므로 그 분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공주 Princess이고 왕자라는 신앙고백으로 명칭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한 때 부끄럽게 여겼던 한국을 이제는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 Korean Princess라고 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한국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입양아가 된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주가 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으면 불행은 더 이상 불행이 아닙니다. 불행한 삶의 조건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만들고,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진정 누리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너무나 감사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언제나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모든 것을 의혹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 뜬 것을 보고도 못 믿으니 이제 누구에게 묻습니까?
18절 마지막에 보니까 "그 부모를 불러"서까지 "묻"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소경으로 난 사람이 너희 아들이냐?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느냐?"
자꾸 묻습니다. 믿으면 간단해지는 것을 믿지 않으니까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을 지금 유대인들이 왜 의심합니까? 의심해서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의심하는 거예요. 의심이 아예 버릇이 된 것입니다. 언제나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사실 이 소경이 옛날부터 소경인 것을 알았을 겁니다. 한 동네 살고 있는데 그 정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혹시 남의 불행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남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이 칭찬받으면 자신이 불편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정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버려져 미국 땅에까지 입양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사람과 믿음의 사람의 삶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믿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몇가지 특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21절을 봅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의심하면서 묻는 유대인들에게 소경의 부모가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모른다, 그러니 장성한 그에게 물어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말하는 믿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個人的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믿음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장성한 그 사람이 그 믿음에 책임을 집니다. 장성한 뒤에는 그 부모가 대답해 줄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자신이 갖는 것이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의 믿음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믿음이 소중합니다. 남의 믿음에 관심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믿음을 내가 평가하고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未成年者라면 몰라도 成人에게는 책임이 자신의 것입니다. 아직 유아기적인 믿음을 가진 자라면 몰라도, 성장한 성인의 믿음은 본인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신앙을 물어보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남의 믿음에 대해서는 물어보시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놓칩니다. 신앙은 내 것입니다. 믿음은 나에게 물어보는 질문, 나에게 하나님의 관계를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물어보라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신앙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내 신앙에 몰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은 힘을 가지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의 특징입니다. 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 이러라."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나의 주인, 나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했지요?
마가복음 8장 29절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이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는 일에는 담대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특징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금 부모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자신들이 출교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거대한 용기를 요구합니다. 출교당할 것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은 이러한 담대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는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브리서 11장 19 절)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입니다.
믿음은 어떤 환경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만도 끔찍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두려움 앞에서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것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에는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친구 관계가 멀어지는 것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좋은 술 친구라도 끊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 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릴 수 있는 용기"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마태복음 19:29)
엄청난 부요함과 쾌락이 우리를 유혹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담대하게 포기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용기와 담대함이 없다면 예수 믿는 일은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예수를 얻으면 다른 것은 잃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국제무역가 죠안 리의 "사랑과 성공은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언제인가 제 3세계의 군부 실력자로부터 군용담요 수십만장과 군용 텐트 수만 동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단가도 상당히 괜찮은 것이어서 제대로 납품만 한다면 꽤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업을 거절해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독재정권으로 분류되고 있는 제 3세계의 군부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도 많지 않은가? 자신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셀프 이미지와 위배되는 것이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가차없이 포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한 여성도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면서까지 벌어야 하는 것이 돈이 아님을 말하면서 용기있는 결정을 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겠습니까?
자신의 이미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미지를 살리는 믿음은 용기입니다. 담대함입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잡아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얻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에 대해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23절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보시오 하였더라."
믿음이라는 것은 도중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성장해 가듯이 우리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장성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해야 하는 일을 아직까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우리는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이 정도로만 만족하거나, 끝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 10년만 열심히 믿으면 得道해서 下山하는 것이 아닙니다. 解脫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계속 成長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절에 가면 선방 앞에 돌이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을 섬돌이라 합니다. 밟고 올라가는 계단이지요. 그런데 대개는
그 섬돌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照顧脚下(조고각하) "자신의 다리 밑을 비추어 살펴보라" 그런 뜻입니다. 사실은 신발을 잘 정돈하고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뜻만이 아닙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비추어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道를 닦는다면 어느 정도까지 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한 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러해야합니다. 나의 믿음이 지금 어느 자리까지 왔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살펴보고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믿음만 자랑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전에 이런 저런 신앙의 소유자였다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長成한 分量까지 이르도록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 신앙인의 목표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장 13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과 아는 일은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것이 目標支點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일생 전부를 바쳐서 이루어가야 하는 거대한 작업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물어보실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도 우리의 신앙의 삶을 이렇게 저렇게 확인할 것입니다.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그런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신앙을 증명해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큰 용기로 믿음을 고백하는지, 얼마나 담대함으로 모든 사건들을 만나는지 우리에게 물어볼 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의 믿음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늘 묻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그저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장성 한 분량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평생 달려갈 때 하나씩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비록 험난한 길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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