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크리스챤
창11:1-9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에덴의 동쪽
제임스 딘이 주연으로 나와 세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영화 에덴의 동쪽이라는 옛날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에덴의 동쪽이란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에덴을 그리워하며 다시 그곳에 들어갈 날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이 생명나무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났습니다.
행동심리학자들이 재미난 발표를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소원이 작은 사람은 그 작은 만큼의 삶을 살았고 소원이 큰 사람은 큰 만큼의 영향을 미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원없이 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삶에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소원이 큰 사람은 질병이 걸려도 빨리 나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원도 善한 소원이 있고, 惡한 소원이 있습니다.
멕시코 대통령에게 미국의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북미와 남미가 그처럼 다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소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북미의 청교도들은 신앙을 위하여 하나님 곧 God을 찾으러 왔지만 남미의 스페인, 포르투칼 사람들은 금 곧 Gold
를 찾으러 왔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북아메리카로 온 청교도들은 하나님
도 찾았고, 금도 찾았지만, 자신을 위해 금을 찾아 남미로 온 사람들은
금도 놓쳤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속에 있는 이러한 악한 소원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세라믹 문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점점 멀리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이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가 심판하실 것 같고 비밀을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쫓아갔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멀찍이 믿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내 중심의 요구사항을 먼저 해결하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도 가끔 나오고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일찍 갑니다.(마태 6: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가인의 후예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기 위해 에덴동산에서부터 동쪽으로 가다가 만난 곳이 시날 평야입니다. 처음으로 사람이 살만한 곳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시날 땅에 머무르기로 하고 그곳에서 그들의 이상사회를 세우려는 야망을 갖게 됩니다. 이곳이 에덴의 동쪽입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바벨론 문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벽돌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석기문화에서 토기문화로, 토기문화에서 벽돌을 만들어 낸 것은 천지개벽 할 만큼 놀라운 사건입니다.
인간이 세라믹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이 최초로 기술혁명을 이루어낸 사건입니다. 세라믹이란 열을 가하여 전혀 새로운 용도의 물체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컴퓨터의 핵심부품인 반도체도 세라믹 제품입니다. 반도체 칩을 "정보의 쌀"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지금 세계는 이러한 정보의 쌀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세계의 경제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때도 세라믹제품을 잘 만드는 것이 곧 부를 결정하는 척도였습니다. 반도체 칩을 발견한 것과 비견할만한 사건이 벽돌을 발견한 것입니다. 돌은 운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돌집에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날 땅에서 많은 흙을 만나게 되었고 그 흙을 불에 구웠더니 아주 단단하고 쓸만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을 발견해서 누구든지 집을 견고하게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초기 인류 역사의 대혁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시대에 흙으로 무엇을 만들었다는 사건은 문화적인 발전과 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기술로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벽돌을 만든 것은 당시의 문화적인 혁명이었고 그들의 사고 구조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벽돌을 구워 집을 짓고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고 항아리를 만들어 사용하는 등등의 일은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벽돌문화는 오늘날에 까지 영향을 미쳐 현대문명의 뿌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과학기술문명이 인간에게 편리하고 좋은 것을 주면서도 우리가 경계하는 것은 그 근원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기술이 결국 목표로 하고 있는 지점은 영생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제인간’의 기술에 까지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은 결국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생명나무에 대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도전하여 그 기술을 알게 되면 필연적으로 세상을 파괴하게 하는 쪽으로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인간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에덴에서 쫓겨나고 하님이 계신 에덴을 잃어버린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을 아십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명 보우트를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구조선은 커녕 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오! 하나님, 만일 우리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옵시면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어놓겠습니다."
그러나 구조선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금 도와주신다면 재산의 3분의 2를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밤이 새어 날이 밝아도 여전히 섬의 그림자도 비추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기도합니다.
"도와만 주신다면 내 재산의 전…"
그때 다른 한 사람이
"잠깐!"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거래를 멈추어라 섬이 보인다!"
인간들의 본심은 이 정도 수준입니다.
本心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가지 예화를 더 들겠습니다.
남아메리카 멕시코에 있는 어떤 마을에 溫泉과 冷泉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호수가 있답니다. 한쪽에는 부글부글 뜨거운 물이 끓어 솟아오릅니다. 그러니까 동네 아낙들은 그곳에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다시 냉천에서 헹구어가며 깨끗한 옷을 빨아서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 모습을 본 외국인들이 말하길
"당신들은 참 좋겠습니다.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쓰니 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까? 모르긴 해도 당신들은 늘 하나님께 감사하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대답은
"천만 에요"
"왜요?"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온천과 냉천만 나올 것이 아니라 땅에서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인간 속에는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보다 욕심이 먼저 발동하며 만족하고 감사하기보다 앞서 불평이 더 많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사는 세상이 결코 천국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벽돌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고상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니고 이론대로 되는 존재도 아닙니다.
공산주의를 보십시다. 그들의 이론대로라면 자본주의는 자멸하고 正反合의 原理에 따라 공산주의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원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고 오늘날의 변질된 형태의 북한과 베트남 중국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벽돌로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인간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탑을 쌓은 이유는
첫째, 하늘 끝까지 가기 위하여 쌓자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반항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의 최대 유혹은 神이 되려는 유혹입니다. 신이 되려는 유혹은 지배욕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섬기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 위에 군림하고 싶고, 명령하고 싶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위기의 인간이 됩니다. 왜냐하면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어제 뉴스에도 보면 전 국세청장이 재직 시절에 저지른 비위, 국회의원이, 모 시장이... 등등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하나님이 안계시면 누구든지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조심하고 사람을 부리지 말고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치입니다. 사람의 정치는 사람을 부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정치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벽돌을 발견한 사람들은 인간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자’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동기는 '우리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명해지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 중에는 神이 되려는 속성이 있고, 자기가 높아지려는 죄인의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고독함과 외로움이 있는 무서운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시날땅에 왔을 때 그들이 발견한 구호가 있습니다.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도전을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8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결국 그들은 성 쌓기를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그리스도가 생명나무
바벨탑을 만든 인간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생명나무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기술로 충분히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릅니다.
인간은 죄의 문제를 회개하지 않고는 결코 생명나무에 이를 수 없습니다. 회개 없는 영생을 줄 수 있다고 외치는 사이비가 과학이라는 종교입니다.
인간의 사고 능력은 중요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죄 된 생각으로부터 죄가 나오고 사랑의 생각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성공하는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Stephen R. Covey 목사님이 쓴 책인데 그는 성공한 사람은 7가지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뀐 사람이 성공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는 생각을 가지면 사랑으로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의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생각이 싹틈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축복도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사명도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사랑도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여류작가 정연희권사의 간증에서 그녀가 한창 인기있고 그의 소설들이 베스트셀러가되고 한창 잘나갈 때 쓴 작품 중에 수녀를 등장시킨 적이 있는데 그 수녀가 강간을 당하는 스토리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흥미를 유발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겠지요. 그 작품을 쓸 때에는 사실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 개인적 욕심과 철학으로 쓴 것이었는데 젊었을 때 하나님을 모르고 한참 人氣있고 잘나갔을 때 쓴 소설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쓴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하나님께 회개를 한다는 간증을 테이프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람의 생각의 뿌리를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예수께서 생명나무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분을 통하여서만 우리는 낙원에 들어갑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예수의 피로 구원을 먼저 받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의 생각과 지식을 버리고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4.어린양 찬양의 폐막식
계시록 5장에는 세계 선교의 완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봉된 책을 취하셨을 때 이십사 장로들이 거문고와 금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를 노래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때 그 노래의 내용에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또한 계 7:9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외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하계 올림픽 대회의 폐막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인류의 반역을 막기 위해서 사용된 수많은 언어가 오순절에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는 역할을 했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언어와 문화 그대로 어린양을 찬양하게 하는 세계 선교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실 것입니다.
계 7: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5.교회의 궁극적 비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 백여 만의 교회 공동체(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의 유일한 비전이 바로 계시록의 어린양 잔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기 때문이고 또한 모든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소망해야 할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궁극적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비전은 없습니다. 다른 비전들은 이 궁극적 비전을 이루기 위한 작은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한 때 천주교에서 전교인들에게 가르치고 부르짖는 구호가 생각납니다.
‘내 탓입니다’하는 짧은 구호입니다. 그것을 자동차에도, 그들이 행동하는 생활공간 곳곳에 스티카로 만들어 붙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내가 그렇게 본을 보이지 못해서입니다. 내가 잘못했음입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썩어지는 한알의 밀이 되지 못한 이유입니다. 돌보지 못해서입니다. 사랑하지 못해서입니다. 죄송합니다.....
우리들 크리스챤의 정신은 그렇습니다. 세상을 흐르는대로 관망하며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 흐르는대로 둥 둥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쎈 물결이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동화되지 않고 거슬러 솟구치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 산 물고기들 처럼 크리스챤들은 세상 속에 들어가서 활발히 활동하며 살아가는데 그 목적은
그래서 소금이 되던지, 빛이 되던지, 썩어지는 밀알이 되던지 제단위에서 불태워지는 한 덩이 고깃덩이 처럼 제물이 되던지... 하며 그런 것들을 생활 속에서 물 튀기듯 자연스럽게 튀기며 살아가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롬12: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생명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거스르며 오르는 물고기들의 활동에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처럼 크리챤들의 삶의 행동의 파편들에게서는 그런 결과물들이 물보라 치듯 튀어나가며 살아가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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