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거듭난 삶 2009. 11. 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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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요한12 :9-36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어두운 이야기입니다만 최근 들어 우리사회가 황금만능, 인명경시, 도덕과 윤리의 실종(失踪) 등 (重病)을 앓고 있다고 야단들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청부 살해를 한다거나 친부모를 잔인하게 죽인 존속살인(尊屬殺人)사건, 등등

이처럼 반인륜적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원인이 우리의 전통적인 효(孝)사상이 실종 된데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데 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윤리의식을 회복하자는데 초점을 맞춰 孝 찾기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없는 자'의 '있는 자'에 대한 갈등, '낮은 자'의 '높은 자'에 갈등, '못 배운 자'의 '배운 자에 대한 갈등 등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하게 범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경제의 급속한 고속 성장에 그 원인이 있는 듯 생각됩니다. 빈부의 격차는 어느 나라 사회든 항상 있어 왔으나 기독교인은 그 빈부의 격차가 갈등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서 밝혀 주듯이 물질이란 근본적으로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것'이라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컨트리 가수 중에 돌리 파튼이라는 여가수의 어릴적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녀는 매우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제대로 계절에 맞게 옷을 입고 다닐 수조차 없었습니다.

돌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초겨울이 되어 날씨가 쌀쌀하고 추워진 어느 날, 학교에 가보니 많은 아이들이 두껍고 따뜻한 오버코트와 재킷을 입고 왔다. 그러나 돌리는 코트가 없었다. 떨고 다니는 모습을 본 돌리의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서 자투리 천을 한껏 얻어와 그 천들을 다 이었다. 밤새 돌리의 몸에 맞게 어머니는 색색가지 색깔의 천으로 코트를 만들어 아침에 학교에 가는 돌리에게 입혀주었다. 어머니가 만든 옷을 입은 돌리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과 정성을 느끼며 그 옷을 기쁘게 입고 학교에 갔는데, 아이들이 누더기처럼 기운 코트를 보고 그녀를 놀려댔다. 형형색색의 천으로 누덕누덕 기워 만든 코트를 입은 돌리는 아이들의 놀리고 웃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오히려 친구들에게 밤새 엄마가 자기를 향한 사랑으로 만든 코트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그 옷을 만든 엄마에게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에 바탕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自我認識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고후6:8)....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에는 올바른 자아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삶의 가치관 형성과 자아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人間性 회복과 道德性 회복의 "길"은 오직 예수 밖에는 없습니다.

몇해 전에 인간성 회복, 도덕성 회복을 위해 기독교, 천주교, 불교, 광복회 등 사회 각계 원로들 50여명이 <孝 세계화 운동 본부>를 발족시킨바가 있습니다.

<孝 세계화 운동 본부> 김삼열 본부장은 사회의 황금만능, 인명경시, 도덕과 윤리의 실종 등, 이같은 병리현상(病理現狀)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효>라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부모를 모시는 사람에 대해서는 세제감면, 특별수당지급, 휴가 등의 혜택을 주어 효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로 만들자는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추진하기 위해 효도세(孝道稅)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한 때 고려대학교 총장은 도덕재무장만이 사회의 이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소학 등 유교(儒敎)의 경전을 대학 교육 필수과목으로 하겠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 아버지가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서 좋은 자녀 양육의 본을 보인, 신앙인이며 교육학 박사인 강영우 박사를 소개합니다.

시각장애인인 강 박사는 어린 자녀들에게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성경과 동화를 읽어주었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읽어주던 점자로 된 책에는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훗날 큰아들이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후

"당신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이나 경험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큰아들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읽어주신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는 아버지의 실명된 눈으로 인해 자기가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며, 오히려 육신의 눈이 없이도 볼 수 있는 세계를 보여주신 아버지를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잠자리에서 읽어주신 이야기들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영원하며, 그로 인해 상상의 세계가 넓어지고 창의력이 개발되었고, 비전이 분명해졌다고 했다. 또한 인간의 가치는 외적 준거에 의해서만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아버지로 인해 오히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도전하며 편견과 차별이 없는 사회 건설에 기여할 의욕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눈을 뜬 자기가 안내자가 아니라 시각장애인인 아버지가 장애인이 아닌 자기 인생을 안내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는 오직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생명의 창조주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모두 마귀(사탄)의 역사(役事)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생명을 잃도록 미혹한 것이 마귀입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사탄), 죄, 사망 이 세 가지는 지옥의 삼총사입니다. 마귀는 죄를 짓게 하고 죄는 사망을 하므로 함께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며, 절망시키며, 분열시키며, 혼란을 야기 시키며, 파괴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요20:31)....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또한 마귀를 없애려 오신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을 없애는 길은 오직 생명이신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시대적인 상황을 성서를 통해 바로 인식해야만 합니다.

"(마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더라 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여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이 들려서 심히 사나와져서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게 되므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무덤 사이에서 동네 사람들을 두렵게 하며 괴롭힌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으나 그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 귀신들린 돼지 떼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몰사하게 되므로 재산의 큰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귀신들린 자의 고침과 돼지 떼의 몰사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 동네를 떠나가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으로 인해 두려워하며 살던 것이 예수 때문에 이제 안심하고 살게 된것은 생각하지 않고 몰사 당한 돼지 떼만을 아깝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신들려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 그 <인간성이 회복>된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 동네에 참 평화가 오게 된것을 망각하고, 단지 몰사당한 돼지 떼,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예수를 추방하는 것이 <생명>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보다 물질(돼지 떼)을 더 중시하는 사회에 결코 사망의 세력인 귀신들이 떠나갈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물질을 더 중시하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북한의 공산당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을 잃었고, 또 지금 생명의 위험을 가져오고 있지만, 남한의 인명경시 풍조의 만연, 물질만능주의의 사회 현상 등은 역시 공산당 못지않게 이 사회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생명>의 예수는 잡아 십자가에 죽이고,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는 것이 인간 사회입니다.

인간성의 회복과 도덕과 윤리의식의 회복은 이 사회에 <예수>가 살아나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인간의 존엄성 회복("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12:26)너희들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한 알의 밀알처럼 사는 것입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죽어지내는 사람이 많아질 때 그 사회에 생명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은 차가운 땅에 떨어져 무덤 속에 매장되는 것처럼 그 곳에 묻힐 때입니다.

기독교가 성장하게 된 것은 많은 순교자의 죽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 죽었기 때문에 교회는 산 교회가 된 것입니다.

전라북도 하리 성결교회에 문형일집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성결교회의 역사는 비록 오래 되었으나 발전하지 못한 채 초가 삼간 예배당의 지붕이 낡아서 비가 새고 형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문집사는 이런 형편을 보고 교인들에게 성전을 새로 지어보자고 권유했더니 교인들은 지레 겁을 먹고 하나 둘 교회를 떠나기 시작해 나중엔 몇 명만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문집사는 자기의 전 재산인 논 서마지기를 팔아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문턱 아래까지 겨우 짓고 나니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는 제단 앞에 엎드려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때는 마침 장마철이라 그 장마가 다 끝나도록 기도한 후에 어느 날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는데, 며칠 전에 신문에서 과학이 사람의 눈알도 이식할 수 있다는 내용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웬일로 그런 생각이 스쳐갔는지 곰곰 생각해 보다가

"아 내 눈을 하나 팔아서 예배당을 다시 지으라는 지시인가 보다"하고 전주 예수 병원 안과에 가서 그런 말을 하니 그 갸륵한 마음에 간호원도 울고 의사도 울고 또 그 소식을 들은 원장인 선교사도 너무 감동되어 울며 교회를 그처럼 사랑하는 문집사를 위해 악수하고 사진을 찍은 후에 미국의 신문에 소개하길,

"한국에는 자기의 눈알을 팔아서 예배당을 지으려는 성도가 있다. 누구든지 이런 일에 참여하고 싶은 이들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방에서 성금이 걷혀지고 선교사는 그것으로 예배당과 주택을 지어주고 또 문집사에게는 논 여섯마지를 사서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밀알이 있을 때 교회와 사회는 꽃이 피고 생명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덴마크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가슴에 노랑별을 달도록 했습니다. 그 당시 덴마크 왕이 있었는데 크리스챤 10세이었습니다. 이 왕은 국민들, 곧 기독교인들에게 우리도 가슴에 노란별을 달자고 호소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노란별을 달아야 하는 그 날이 밝았을 때, 가슴마다 별을 단 덴마크 국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유대인도 덴마크 시민인데, 차별하려면 우리도 차별하고, 죽이려면 우리도 함께 죽이라는 시위였습니다.

나치의 유대인학살이 가장 적었던 점령지가 바로 덴마크였습니다. 크리스찬 10세 國王을 선두로 기독교인들이 일치단결하는 사랑의 실천으로 유대인들을 최대한 보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우리 사회를 예수화(복음화)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예수가 살고 내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기 위해서는 자아(ego)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를 죽이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는 제아무리 많은 운동본부나 기관 단체 등 등을 세워본들 그 사회와 국가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살리는 정치, 예수를 살리는 경제, 예수를 살리는 종교, 예수를 살리는 문화, 예수를 살리는 교육, 예수를 살리는 운동이 일어나야만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아울러 도덕과 윤리의식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고전 16: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매일 죽고 예수를 살리는 다짐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내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내가 죽고 예수를 살립니다.

자아(ego)가 죽을 때 생명의 영(靈)이신 성령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자아가 죽을 때(self-denial) 자기 중심주의(ego-centric)에서 하나님 중심주의(God-centric)로 변화되어 삶의 가치관이 바뀌게 됩니다.

죽음은 누구나 싫어합니다.

어느 팝송가사에서도 "천당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나 천당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노래가 있는데, 천당은 모두가 좋다고 하지만, 천당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당이 확실해도 죽음의 고통을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의 아침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썩는다는 것은 아픔이요 고통입니다.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때를 위햐여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그러나 십자가 후에 부활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고통과 아픔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자아가 죽을 때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누가 죽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자아(ego)가 죽어야 하는 곳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바로 여기에 십자가에 생명의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생명으로 넘치는 길은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고대 무덤의 유물에서 5천년전의 볍씨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한 알의 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 썩지 않으면 5천년 아니라 수 만년이 된다 할지라도 한 알 그대로 입니다. 교회 생활을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했어도 십자가에 자아가 죽지 아니하면 꽃이나 열매가 달릴 수없는 것입니다.

미국 교회 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째 달구지같은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밀어야만 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둘째 연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 고양이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줄곧 토닥거려줘야 만족하는 교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넷째 풋볼(미식축구)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교인'을 말합니다.

다섯째 풍선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교인'을 말합니다.

여섯째 전구(電球)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이는 '쉴새없이 켜졌다 꺼졌다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교인들은 모두가 자아가 십자가에 완전히 죽지 않아서 자기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믿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생명의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영광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생명력 넘치는 사회가 되어 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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