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거듭난 삶 2024. 1. 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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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 전도 3

[유럽으로의 복음 진출]

 

성 경: [17:28-31]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 이 구절은 크레타(Creta)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 des, B.C.6세기)4행시 '크레티카'(Cretica)에도 나온다.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 (Minos)가 그의 부친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당시 아덴인들에게 익숙했던 이야기를 통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증거 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소생 - 이런 표현은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Aratus, B.C.315-240)의 시 '패노메나'(Phaenomena)에 나온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클레안데스(Cleanthes, B.C.331- 233)의 시 '제우스에게 드리는 찬송'(Hymn to Zeus)에도 나타난다.

 

바울이 이곳 외에도 희랍의 시를 정확하게 몇 차례 인용한 사실로 미루어

 

(고전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그는 희랍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렇듯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與件)을 이미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희랍적인 지식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희랍 세계의 시를 인용하여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며 성경적이었다.

 

한편 24-28절의 바울의 설교는 다음과 같이 희랍의 철학적 사고와 비교된다.

바울의 설교 헬라의 철학적 사고
하나님은 한 분이다. 스토아 철학 : 범신론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에피큐로스 철학 : 세상 만물은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온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
인류는 한 하나님에서 창조되었고 같은 조상을 가진 후손이다. 아덴 사람들은 아티카(Attica) 본토의 흙에서 생겨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자부함.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삶을 섭리하신다. 에피큐로스 자연신론(deism) : 신은 인간의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음.
천지의 주재시다. 인간이 드리는 희생제사를 통하여 신들은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 한사람의 손으로 신들을 새겨 만질 수 있다고 여김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 바울의 이 말은 스토아 철학(Stoicism)의 범신론적인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 그대로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현자(賢者)이고, 현자는 또한 신과 같은 자라고 한다.

 

이는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보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관, 인간관과는 배치된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용어인 '신의 소생'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인간론의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따라서 자연물(, , 돌 따위)로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인간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증의 독특함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점진적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절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 선포와 절단에의 촉구로 옮겨가고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란 바울이 이미 루스드라에서 '지나간 세데'(14:16)라고 표현한 말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가리킨다.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보지않다', '간과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또 심판보다는 가급적 회개의 때를 기다리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상 숭배 행위마저 참고 견디시며 자신을 자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계시하셨다.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그 정체가 드러났고 아울러 '알지 못하던 시대'도 끝이 났다.

 

회개하라 - 이는 계속적인 명령의 뜻을 내포한다. 이 회개는 삶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데 여기서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용서와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가르치는 바울 사상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회개에 대한 강조점이 여전히 나타난다.

 

(살전 1:9-10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정하신 사람 -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서 언급하신 것 같이

 

(14: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 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 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아울러 온전한 인성(人性)을 지니고 세상에 오셨고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본절에서 심판주를 '사람'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이 다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심판주란 의례히 초월적 위엄과 권세를 지닌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18:8).

그러나 이 표현은 후반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이란 구절과 연결되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본절은 인자의(죽으심과) 부활이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곧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바울의 설교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설교를 두고 한낱 철학적 강변 또는 자신의 지식과 언변에 대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리거나 그의 아덴 사역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실 바울이 아덴에서 신자들에게 침례를 주었다거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분명한 성과를 보았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사역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바울의 아덴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의 이 설교는 결코 철학적 강변이 아니다.

이 설교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샛별같이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