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거듭난 삶 2024. 1. 1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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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사역

 

성 경: [19:1-10]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복음에 대해 정확히 가르침을 받은 후, 아가야 지방의 수도 고린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18:26-27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따라서 바울이 에베소에 당도할 즈음에는 아볼로는 그곳에 있지 않으므로 두 사람이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동일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에 활발히 전파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어느 정도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전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 18:23에서 끊겼던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여기서 '윗 지방'이란 일반적으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Zahn, Bauernfeind).

 

에베소 -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도시로서 코레소스(Koressos) 산맥과 에게해 사이의 카이스터(Cayster) 강 어귀에 위치하였다.

 

이는 항구도시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아시아의 보고'로 불리울 만큼 번창하였다. 그러나 각종 미신들과 이방 종교들과 사회적 병폐들이 만연해 있었다.

 

당시 에베소인들은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점점 잃어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전부터 섬겨오던 아데미 여신을 더욱 더 열심히 섬겼는데 이 여신의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 하나였다.

 

제자들 - 누가에 있어서 제자란 대개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다는 것(3)은 이상한 일이다.

 

(3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이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도(18:26) 무관한 사람들인 것 같다.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왜냐하면 이들이 그 부부와 관련이 있다면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볼로 역시 이미 고린도에 가고 없는 터여서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시된다.

 

추측건대 이들은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전, 성경을 가르칠 때 그에게 영향을 받아 믿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바울이 어떻게 해서 이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진술되지는 않았으나 아마 바울이 그들의 신앙 상태를 통찰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 이들의 대답에 바울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를 진정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다는 것은 '요한의 침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반증한다.

 

즉 요한은 자신의 침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물로 침례를 베풀지만 예수께서 오시면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풀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19:3-4]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 바울은 요한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요한의 침례에 관한 정확한 의미와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을 올바로 가르쳐 주었다.

 

요한이 베푼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마음의 변화와 근본적 전환을 위해 베푼 회개의 침례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 회개의 침례는 요한 뒤에 오실 이, 곧 예수를 믿게 하기위한 것이다.

 

때때로 침례 요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침례 요한을 계시의 절정으로 보며 심지어는 메시야와 동일시 하기도 했다.

 

(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러나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 따름이었다.

 

(3: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따라서 요한은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 침례'를 위해 먼저 '회개의 침례'를 베풀었다.

왜냐하면 회개 없이는 성령을 받을 수 없으며 또 근본적으로 회개케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Lenski) 때문이다.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 바울의 가르침으로 자신들이 모두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자진(自進)해서 침례를 받았다.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안수하매 성령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표적들은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와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고넬료의 집에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나타났던 표적들과 동일한 것이었다.

 

(10:44-46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특별히 이곳에서 나타난 방언은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

 

(고전 12:4-10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여기서 성령 침례를 받은 열 두 사람들은 후에 에베소 교회의 핵심 인물들이 되어 이방 선교에 전심전력했을 것이다. 혹자는 이 사건을 두고 '에베소의 오순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 여기서 12라는 숫자를 두고 학자들(Weizacker, Wendt)은 비유적 해석을 시도한다.

 

즉 숫자를 예수의 열 두 제자나 이스라엘 민족의 열 두 지파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려고 하나 저자 누가에게 그 같은 의도가 있었다는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만약 그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의도와 연관된 부연 설명을 했을 것이다.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

 

이미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이 회당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18:19, 21)고 약속했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는 회당 사람들의 호의적인 태도로 석 달 동안이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석 달이란 기간은 이제까지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중 가장 긴 기간이었다.

 

여기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는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바울이 회당에서 석 달 동안 계속해서 쉬지 않고 담대히 말씀을 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권면했다'는 바울이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설득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동원했다는 뜻을 나타낸다.

누가는 바울이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마음이 굳어 - 바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마음을 굳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열려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의 문을 굳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두고 이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굳어 질대로 굳어 진 마음들은 부서지거나 깨지기 쉽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굳어진 마음들이 부서져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의 적대감(敵對感)이 매우 심했던 까닭에 바울은 더 이상 회당을 복음 증거 장소로 이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다.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 이 제자들은 바울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곳에서 얻은 제자들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로부터 떠나면서 그곳에서 얻은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여기서 '따로 세우고''한계를 분명히 하다', '구별하다', '떼어놓다'는 뜻으로서 바울이 복음을 거부하는 완악한 자들로부터 새로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따로 구분하여 새로운 교회를 형성케 했다는 의미이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 '두란노'가 이곳에서 가르쳤던 선생의 이름인지(Zahn) 아니면 이 서원의 소유주의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 서원 자체의 이름인지는 정확지가 않다.

 

한편 서방 본문(Western Text) 몇몇 사본에 따르면 5시부터 10시까지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이 사건은 보통 당시의 오후 휴식 시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사본들에 따르면 바울은 사람들이 일하는 노동 시간을 피하여 이 휴식 시간에 말씀을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일하는 시간에 말씀을 가르쳤다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서원에서 집회를 가진 후에 청중들과 함께 다시 일과를 시작하여 오전에 하던 일을 끝마쳤을 것이다.(Haenchen, Longenecker).

 

이곳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2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에베소에서 큰 결실을 이루어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했다.

 

 

 

[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 2년 동안 바울 열심있는 사역은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많은 교회를 탄생시켰다.

 

루커스 계곡(the Lycus Valley)에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세워졌고, 소아시아 지역에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등 여러 교회들이 속속 세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