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거듭난 삶 2024. 1. 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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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 있어서의 바울

 

사도행전 1710-34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이 장은 바울이 아텐(아테네)에의 학자 앞에서 말한 연설의 수록으로, 고린도전서 13장 등과 함께 유명한 장이다.

 

누가는 비범한 역사가로서,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잘 그 주의를 전하고 있다. 역사를 쓰려는 자 또는 읽으려는 자는 모름지기 누가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학의 대가 몸젠은 사도행전을 모범적 역사서라고 했다.

 

예수의 전도의 처음 기사가 복음서이고, 사도행전은 그 계속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의 전도는 끝난 것이 아니라, 나사렛의 한 촌에서 시작한 가르치심은 유다 전국에 펴지고, 안디옥에 이르고, 그리스에 이르고, 마침내 로마의 중심에 들어가고, 이제 계속하여 온 천하에 퍼지고 있으므로, 누가에게 여명 있다면, 로마를 중심하여 그는 사도행전 제2편을 썼으리라.

 

바울의 로마행은 아마도 다소에 은거했을 때부터의 소망이었으리라.

오늘의 있어서는 보통 일처럼 생각되지만, 당시에 있어서는 실로 꿈같은 소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망은 마침내 사실로 되었던 것이다.

 

나사렛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에는 몇 단계가 있었고 진보가 있었는데, 누가의 붓은 잘 이것을 유감없이 전하고 있다.

 

대략 역사서에 두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단지 사실의 나열로서, 건조무미 읽을 수가 없다.

다른 하나는 극단으로 분식에 힘쓰고, 사실을 희생시켜 소설적으로 기록함으로서, 신빙을 둘 수가 없다.

 

하나는 정사이고, 하나는 패사, 전자는 연표식 무미, 후자는 가공의 상상으로서 꾸며진 것이다.

 

하지만 누가에 있어서는 정사도 패사도 아닌, 정사이면서 패사, 사실과 흥미를 함께 한 것이다.

 

후세의 칼라일의 사필이 좀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일본에는 그러한 역사가가 없고, 우리들은 흥미있게 그릇됨이 없는 우리 국사를 읽을 수가 없다.

 

인생의 ㅡ 사실은 본래가 흥미 많은 것으로서, 사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낫게 재미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그대로 엮음으로서, 여자도 어린이도 듣고서 마음 깊은 곳에 공감(호소)되는 것이다.

 

누가에게 그러한 역사가 기록된 것이 그에게 성령이 가해진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문필에 종사한 사람에게는 잘 이해되는 것이다.

 

사실을 간단하게 붓으로 쓰면 그것이 아주 재미있는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실험(경험)없는 자는 없고, 그 실험을 있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 참된 신자이며 또 문장가이다.

 

본 장 같은 것은 그 좋은 적례로서, 바울이 아덴에 간 기사 같은 것은 실로 재미있는 기사이다.

 

암비볼리아볼로니아 등은 상당한 도회이지만, 예에 따라 바울은 중요한 장소를 지향하여 나아가, 이들 성읍들을 돌볼 겨를 없이, 그저 통과했을 뿐이다.

 

데살로니가에는 회당 있어, 여기서 잠시 발을 멈추어 성서를 논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했다. 속속 신앙으로 들어서는 자가 생겨, 유대인의 투기로 소동이 생겼다.

 

신도들의 호의로 겨우 소요가운데서 벗어나 베뢰아로 가서, 여기서도 또 회당에 가서 도를 전했다.

여기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는 성정이 좋아, 바울이 말하는 바를 경청하여 열심히 성서를 연구하고, 많은 사람이 믿어, 그 세력은 귀족 사회에 까지 미쳤다.

 

유대인이 와서 여기서도 또 소란을 일으켜, 바울은 다시 형제들의 전송으로, 실라디모데베뢰아에 남겨두고서 단신 아덴으로 갔다. 누가는 아마도 빌립보에 남아 있었으리라.

 

아덴그리스의 수도로 당시 문화의 중심지, 바울이 오랫동안 원한 땅이다.

 

한번 여기에 복음을 전하고자 함은 실로 그의 다년의 원망(願望)이었다.

이제 만만(백신만만)한 희망을 가지고서 이 땅에 들어가게 되어 감개무량했으리라.

 

그는 베뢰아에 남겨둔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시중(市中)을 산보하고, 시민이 모두 우상을 섬기고 있음을 보고 심히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당시 아덴의 우상은 미술의 정교를 다한 것으로서, ()의 신이라든가 예술(藝術)의 신이라고 하여 오늘 우리가 보는 것 같은 살풍경의 것은 아니다.

 

사람은 아덴에 들어가 굉장 화려한 시가(市街)의 미관에 놀라고, 찬연한 문예 미술을 탄상하여 마지않지만, 바울은 아덴에 들어가 제1로 우상숭배의 정형을 보고 그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에게 미술을 보는 눈은 있었으나, 이에 잡히지 않고서 백성의 마음의 부패를 탄식했다.

 

미술가나 고고학자의 탄상하는 바도 신자에게는 탄식의 재료이다.

 

보통 사람은 그 문화에 잡히고, 철학자는 이 파 저 파의 철리에 잡히며, 예술가는 희대의 조각 회화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보통이지만, 바울은 이들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우상숭배에 마음을 아파하며, 날마다 회당 또는 시에 있어서 만나는 사람과 논난했다.

여기서도 그의 열렬한 풍격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도시란 오늘의 물품 매매의 장소를 말함이 아니고, 당시 사람들이 모여 정치상 및 학술상의 의론을 하는 곳으로서, 여기에 정치가 오고 학자 오고 종교가 모여 갑론을박 아주 성했던 것이리라.

 

대담한 바울은 여기 가서 우상숭배의 비()를 논하고, 그 독특의 복음을 말했던 것이다.

 

당시의 철학자에 이파(二派)있어서, 하나를 에피크로스파라 하여 오늘의 쾌락파에 해당되고,

기타를 스토아파라 하여, 전자의 반대에 극단한 제욕주의로서, 오늘의 선종(불교-)이 잘 이것을 대표하고 있다.

 

이 세상에 잡힌 자와 이 세상을 업신여기는 자로서, 쌍방 모두 진리는 아니고, 실은 쌍방 모두 이 세상에 잡힌 자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이 두 가지 외에 갈 곳 없는 것으로, 어느 세대에도 이 양파는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자칫하면 혹은 스토아파로 보이고 또 에피크로스파로 보이는 것이다.

 

요한이 들에서 꿀을 먹고, 메뚜기를 먹으니, 사람들은 곧 스토아파라 하고, 예수, 제자들의 초청에 응하여 연석에 앉으니, 곧 눈을 치켜보면서 에피크로스파로 지목했는데,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쌍방 모두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육의 일 반드시 비천이 여길 것 아니고, 가정의 생애 같은 것은 버려야 할 것은 아니나,

동시에 또 잡혀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 적도(適度)를 얻으려는 우리들의 공부노력은 무효인 것으로서, 다만 부활의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전부는 해결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논한 때, 스토아파의 학자도 에피크로스파의 학자도 쌍방일면의 진리 있음이 말해져, 자기편으로 생각하다가 또 그렇지 않은데 실망하여, 나중에는 이 말장이가 무엇을 말하려는 가고 비웃었다.

 

말장이란, 원어는 씨 줍기라는 뜻으로서, 새가 풀씨를 줍는데서 생긴 말인데, 소위 겉핥기’, ‘여기 저기 읽는 일등을 뜻함이다.

 

그리고 또 어떠한 사람은, 다른 귀신을 전하는 자 같다고 하여,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의 평의소(법정)로 가서, 그 설을 재판하게 되었다.

 

아레오바고산은 시의 중심에 있어, 도쿄의 아다고 야마같은 것으로서, 산 위의 돌을 쪼아 의자로 하고, 유명한 학자라든가 국가에 공로 있는 자가 재판인이 되어 학설의 시비를 논하는 학문상의 재판소이다.

 

이 재판인으로 되는 사람은 지식 경험에 뛰어난 국가의 공로자로서, 적어도 60세 이상의 인물이었다는 것으로, 오늘 미국 상원의원들도 미치지 못한 인물의 총림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아테네의 일반 시민의 자식이 뛰어났던 것은, 오늘의 베를린이나 빠리의 시민도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음은,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각 본류가 퍽 고상한 것으로 일반인이 잘 이것을 즐길 수 있었던 것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백발의 노학자, 유식한 시민, 몇 천백 명 앉아서 학설의 시비를 논판 했던 당시의 위관상황 짐작할 만한 것이다.

 

바울은 아무런 후원자 없이, 한 사람의 친구 없이, 단신(單身)이 시민 학자 앞에 서서 그의 복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이 경우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다.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교수들 앞에 선 이상의 곤란이다.

그는 몇 번이고 왕후 귀족 앞에 서서, 제사장 권관에 대해서 복음을 말하고, 자기를 변호하는 곤란을 감행했지만도, 그것은 모두 이 세상의 권력자였는데, 이제 그의 앞에 있는 것은 고원한 진리의 연구에 생애를 맡긴 최고의 대학자들이고, 주위에는 지식에 뛰어나고 비평에 능한 아테네의 시민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학자와 문명인은 이 말장이’(짓거리는 자)의 설을 일소해 버리려 대비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대연설은 시작되었다.

성령의 원조가 있지 않고서는 그저 대담 만으로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언설은 2시간, 3시간, 혹은 4, 5시간에 걸친 대연설이었으리라.

 

본장 22절 이하는 그 초록(抄錄)으로서, 그의 웅변을 알기에는 부족하지만도, 그 사상의 위대함은 엿보인다.

 

이 대 연설을 그렇듯 간단히 집약하여, 그것도 요점을 빠뜨리지 않은 누가의 기량은 참으로 경복(驚服) 할만하다.

 

신약성서 전체가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요약하여 쓴 것으로서, 조금의 장황함이 없는데, 누가의 붓은 또한 특별하여, 정련 간결당에 들어간 것이다.

 

바울은 개구(開口) 먼저 아테네인의 경신심에 호소하여 그의 복음의 전제로 했다.

 

귀신을 공경한다……(17:22)는 것은, 주로 경신(敬神)의 뜻을 말한 것으로서, 오늘 우리들 사이에 말해지고 있는 귀신의 뜻은 아니다.

 

바울같이 사람의 감정에 주의하고 예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 상대자를 모욕하는 것 같은 말을 쓰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경신심 두터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제단에 드릴 여러분의 이른 바 <알지 못하는 신>을 말해 드리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논법 실로 교묘하다. 이는 가장 좋은 호소의 방식으로서, 열심과 숙련의 결과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아테네에 있어서는 인간의 수보다도 우상의 수편이 많았다는 것으로서, 사람이 아는 한의 신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하여, 하나의 재단을 만들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각서해 놓았는데, 바울은 산보의 도중 이것을 보았으므로, 취하여 복음을 말하는 재료로 했던 것이다.

 

우주를 창조하신 천지의 주이신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는 이가 아니고, 또 사물에 부족한 일이 없으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섬길 이가 아닌 것을 말하고, 나아가 모든 백성을 하나에서 지으신 것을 말했다.

 

여기서 한 피에서라고 있음은, 단지 하나에서 혹은 일원에서라고, 해야 하리라.

 

사람에게는 본래 차별은 없으므로, 인종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됨이다,

 

나라는 장소를 달리하고 때를 달리하며 성쇠 있고 흥망 있다 해도, 인류는 본래 이는 하나님에 의해 일원에 창조된 것이라고, 이는 그리스인에게는 신설(新說)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인은 하나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으로, 바울의 설의 대담함에 놀랐다.

당시의 그리스인 뿐 아니라 오늘의 구미인에게도 이해되지 못하는 일로, 그들은 백인과 황인과는 다른 것이고, 흑인과는 동일로는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선년(先年) 미국에 있던 무렵, 훌륭한 신자인 모 신사와 지방에 여행하는 중, 백인과 흑노와 전연 주거를 따로 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은 상태를 보고 이상히 여겨, 이것을 그 신사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차라리 우상신자가 되더라도 흑인과는 함께 될 수는 없다)고 당연한 듯 대답하면서 태연한데 놀랐는데, 이 한 가지, ()로서 일반의 의향을 알기에 족한 것이다.

 

바울이 인류 일원을 단언한 것은 매우 대담한 일로서, 이는 신앙을 떠나서 단지 철학자의 말로 한 대도, 천고에 전해져야 할 위대한 말이다.

 

그는 이것을 정치상의 편의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인 까닭에, 사람이 받거나 않거나 관계않고 주저하는 바 없이 말한 것이다.

 

우리들의 어버지는 모두 한 분 아니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한 분 아니신가’(말라기서 2:10)라는 것은 예언자 말라기가 일찍이 말한 바이다.

 

국민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전 인류의 일부분으로서, 다만 주소와 흥망의 때를 달리 할 뿐이다.

 

오늘 세인이 이것을 믿을 수가 있다면, 많은 국제문제는 해결되고, 구주(歐洲)의 들()을 피로 물들이는 것 같은 목하의 참극도 연출되는 일 없이 지냈으리라.

 

하지만 슬프다.

이것이 이해되지 못하여, 번영하는 때에 있는 자는 곧 교만해져 전 세계의 지배가 맡겨진 것으로 믿고, 타의 영토를 침범하려 하여, 종종 평화의 천지를 수라장 되게 하는 것이다.

무릇 어떠한 국민이라도, 또 어떠한 영웅이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과 때를 범할 수는 없다.

 

나라의 영토에 한계가 있고, 번영하는 때에 한계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소위 충군 애국가는 노하여 말하리라.

우리나라의 윤성은 천양과 함께 한없고,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독일인도 말하는 바이고, 세계 중 군국주의자가 어느 누구이고 말하는 바로서, 분쟁이 생기는 기초이다.

 

세인은 흥망성쇠는 천운의 순환으로서 은명이 그렇게 하는 바라고 하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 구하게 하시렴에서이다.

 

나라의 흥망도 사람의 성쇠도 하나로서 무의미하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흥하는데 때가 있고 쇠하는데 때가 있다.

우리들은 이에 의해 하나님을 찾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글의 예언은 적중하여 일본은 제2차 대전을 일으켜 1945년 패망했다-역자).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은 천상 높이 먼 곳에 계서서 찾기 어려운 이가 아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들은 물고기가 수중에 있음 같이 하나님 가운데(안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촌각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그()로 말미암아 살고, 또 움직이며, 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7:28) 이는 철학자의 말이다.

 

그러한 역사상 철학상의 깊은 바를, 바울 선생은 언제, 어디서 배운 것일까? 알고 싶어진다.

 

너희들의 시인들도……라고 말한 시인이란, 클레안테스, 아라토스를 가리켜 말한 것이리라.

특히 아라토스는 바울과 동국인이므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 시를 암송했으리라.

 

바울의 우상 공격의 방법은 우리들이 배울만한 것이다.

잘못은 어디까지 바로 잡지만 예를 잃지 않는다.

 

그들의 철학을 인용하고, 문학을 인용하며, 고상 우아한 말로서 하여, 상대자로 하여금 조금의 악감을 일으키게 하지 않는 그 태도의 훌륭함은 존경할 만하고, 지금의 천박한 전도사들이, 승려가 머리가 어떻다든가 법의가 어떻다든가, 번번이 욕(나쁜 말)을 하여 불교를 공격한 것으로 득의의 표정을 가지는데 비하여, 실로 오늘날의 우리들이 배워야 하겠다.

 

함부로 욕설하지 않고, 상대자의 사상에 호소하여 쳤다. 부드러운 데가 있으나 깊은 것이다.

그는 일찍이 안디옥에서는, 시골 사람의 말을 가지고서 잘 그들의 심정에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지금 학자 앞에서는, 주저하는 빛도 없이 그들의 말로서 자기 주장을 말하고 있다.

 

그는 지방인에 대해서도 학자에 대해서도, 정치가, 제사장, 누구에 대해서도, 잘 그들에게 호소하는 알맞은 연설을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철학자로서도 정치가로도 쉽게 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러나 그러한 것을 돌보지 않고 복음 선전(전파)에 생애를 바친 것이다.

 

바울은 차근차근 우상숭배의 비리를 논하고, 죄의 회개를 역설, 의의 심판을 말하고, 나아가 주 예수의 부활을 말했다.

 

이는 사람이 죄가 사유된 증거로서 중요한 일로서, 철학문제는 아니다.

 

바울의 생각으로는, 죽음은 죄가 사유되지 않는 무엇보다의 확실한 증거이고, 부활은 사유된 실증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사람은 부활을 철학 문제로서 연구하려 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알지 못하나, 일단 이것을 죄의 사유의 도덕문제로서 보는 때는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도덕심이 둔하여, 부활은 다만 사자의 부생으로만 보고, 이 반생리적 사실의 증명이 서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성립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실로 불안한 것이지만, 이것은 죄의 사죄의 실증으로서 누구에게도 해독되는 도덕 문제이다.

 

애석하다, 저 바울이 이르는 곳 반드시 충돌이 일어난다. 사람의 사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테네 사람은 지금까지는 경청하고, 있었으나,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자는 조소하고 어떤 자는 후일 다시 듣기로 하고 가버렸다.

 

그는 먼저 우주 만물에 구하여 하나님의 어떠한 이심을 말하고, 다음으로 만국의 역사에 의해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창조하시어 거처(사는 곳)와 성쇠의 때를 정하신 것을 말하고, 다음으로 철학에 의해 천하만인이 형제임을 말했다.

 

천연으로서, 만국의 역사로서, 철학으로서 하나님을 소개하고, 최후에 묵시에 의해(호소하여) 부활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학자들은 천연의 일, 역사의 일, 철학의 일은 기꺼이 이것을 들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겨우 디오누시오, 다마리 외에 수인의 믿는 자가 있었을 뿐으로, 모두 조소 경모 가련한 자로서 바울을 대했던 것이다.

 

그가 만약 천연, 역사, 철학의 일(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박학(博學)광량의 대가로서 학자의 칭찬을 받았으리라.

 

지금의 전도사는 영리하여, 그들의 말을 여기서 그치고, 부활을 말하여 학자의 조소와 세상의 충돌을 사는 어리석음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세인은 그 박학에 감격하고, 자신도 역시 이것을 자랑하나, 바울에 있어서는 부활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애초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으로, 이것을 말하기 위한 연설이어서, 충돌은 알면서 주저하는 일없이 이것을 말했던 것이다.

 

과연 충돌은 곧 일어났으나, 여기서 또 수명의 신자를 얻은 것이다.

이것을 그만 두었더라면 충돌은 생기지 않고 칭찬받았을 것이나, 이 신자를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배울 바로서, 옛날도 지금도 충돌을 피하여 신자는 생기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전도자는 많이 철학을 말하고 역사를 말하여 박수갈채를 받고서 족하게 여기지만, 그들의 소개하는 그리스도가 천연의 그리스도이며 역사의 그리스도이고 철학의 그리스도이면서 부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들의 전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실로 헛된 일이다.

 

많은 사람이 각양의 비평을 하고서 아레오바고 산을 내려왔으리라. 이것을 듣고서 바울의 감회는 어떠한 것이고 상업지인 고린도로 갔다가, 다시 아테네에 가지 않고, 이후 고린도가 그의 그리스도 전도의 중심으로 되었다. 이에 의해서도 그의 아테네에 대한 인상을 알 수가 있다.

바울은 학자촌의 아테네에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내촌의 글에서 퍼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