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고 독 (孤獨)

거듭난 삶 2009. 12. 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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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독  (孤獨)


 요16:32-33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 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L.A Time誌에 84세된 어떤 할머니의 편지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편지 내용이 이랬습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내 편지를 받을 대상이 없어서 편지를 쓸 수 없습니다. 내 아파트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체국을 향해서 이 편지를 씁니다. 편지 속에는 우표 몇장과 1 달러가 들어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분이 저에게 편지를 써 주실 수는 없습니까? 이 편지를 받는 분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주실 수는 없습니까?


 러시아의 文豪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돌과 두 여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두 女人이 노인인 스승 앞에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나왔습니다. 이때에 노인은 두 여인에게 말하기를 현재 마음속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죄의 문제가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더니, 한 여인은 대답하기를 자기가 젊었을 때 남편을 한 번 바꾼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큰 죄로 생각되어 지금도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고 일생동안 무거운 마음으로 회개하며 산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또 한 여자는 대답하기를 자기는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 왔기 때문에 아무 죄도 범한 일이 없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노인은 처음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시하는 것이니 너는 지금 당장 밖에 나가 큰 돌 하나를 가져오되 가능한 한 네가 들 수 있는 큰 것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여자에게는

 “너는 가능한 한 작은 돌들을 가져오되 네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많이 가지고 오라.”고 하고는 자루 하나를 주었습니다.

 두 여인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즉시 밖으로 나가서는 큰 돌과 작은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때에 노인은 다시 말하기를

 “이번에는 그 돌들을 있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큰 돌을 갖고 온 여인은 있던 자리를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그 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었으나 작은 돌을 한 자루 담아온 여인은 그대로 그 돌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어 그대로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노인은 말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란다. 큰 죄는 언제나 기억이 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질 수가 있지만 작은 죄는 속히 잊어버리기에 자기는 죄가 없는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면서 더 큰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교훈하는 내용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깨끗한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그 죄가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뉘우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28:13에“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그리고 사55:7에는“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면서 죄에서 속히 돌이키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의식이 희박해졌다는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죄를 즐긴다는데 더 큰 문제의 심각성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든 문화적으로 보든 사회적으로 보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죄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죄는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의식입니다. 오늘날 죄가 더욱 무서워지고 가혹해지고 악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악해져서 그럴까요? 아니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다가온 충격이 커서일까요? 충분히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 내면에는 또 다른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웬만해서는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도 사라졌고, 불가피했다느니, 인간은 본래가 약한 존재라느니, 환경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쓸데없는 변명만 늘었을 뿐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 속에 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겪게 되는 고독은 매우 불행하고 치명적일 수도 있읍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춘기를 겪습니다. 보통 남자 아이들은 12-14세, 여자 아이들은 10-12세가 되면 사춘기가 옵니다. 이때는 희망에 부풀고 무엇이든지 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간섭받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부모에게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가 발동하는 때입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독립해 봐야 되는 게 없습니다. 기분에만 의존합니다. 아직까지 여전히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듯 죄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독립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는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당신 없이도 될 것 같습니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가 있으니 이제는 당신이 내 곁에서 더 이상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나는 독립하렵니다.”이것을 <승리>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승리가 아니라 <죄>입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분홍신> 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마술사가 만든 분홍 신이 있는데, 그 신발은 누구든지 한번 신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춤을 출 수밖에 없는 마법의 신발입니다. 한 소녀가 그 신발의 아름다움을 보고 호기심에 이끌려 신발을 신게 됩니다. 분홍 신을 신은 소녀는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날렵하게 춤이 춰지는지 정말 황홀했습니다. 화려한 거리에서 수많은 청년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소녀가 자기 집 문 앞에 와서도 춤을 추는 것을 본 어머니가

 “이제 그만 춤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애원했지만 분홍신의 마력은 소녀를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이제는 춤을 멈출 수가 없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춰야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급기야는 계속해서 춤을 추다가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자유>가 때로는 우리를 죄의 함정에 몰아넣을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서 그야말로 죽어야만 끝이 나는 악한 죄질에 놓인다면 더 없는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어야합니다. <의인>이란 <착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죄에 둔감한 사람은 벌써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 33 :1-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본문에서 모세가 한 일을 가만히 보면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진 밖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정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진(陣)>이란 이스라엘이 거하는 주거지역이었습니다. <진(陣)>안은 언제나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입니다. 불신과 원망이 가득 하고,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주장이 있고, 욕심이 있고, 죄악이 있고, 배신과 중상모략과 부정과 부패와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을 떠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의 영적 상태나 자신의 신앙의 태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일들에 더 관심과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점점 세속화가 되고 있습니다. <진(陣)>을 떠난다는 말은 인간 세상 속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잡다한 일들과 욕망에서 벗어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조용한 시간, 일상의 번잡함으로부터 구별된 장소, 때로는 하나님과 홀로 대면할 수 있는 고독이 보장된 처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ex) 미국을 혼자 여행했을 때의 경험입니다. Motel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서 Camping Ground를 찾은 경험...나무숲 우거진 속에 위치한 곳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곳분위기가 어찌나 고요하던지 스치는 바람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고요로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 혼자여행하는 나그네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고독>입니다. 일상의 번잡함이나 세속의 욕망이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한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만을 응시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기 위해 회막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정체를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수 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의 길에 서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孤獨者>가 되십시오.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언제나 日常의 雜多함이 있는 진중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만족에 빠진 다수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기도로 역사를 움직이는 창조적 소수가 되시겠습니까?


 온갖 수많은 인파로 들썩였던 축제의 장소들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가 흩어져버린 축제가 끝난 다음 날, 텅 빈 거리는 하릴없이 우리의 마음속을 쓸쓸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져며 오는 외로움을 맛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竹馬故友가 엄청난 피해만 끼친 후 배신하고 도망가 버린 경험일 수도 있고, 목숨처럼 소중한 사랑을 헌신짝 버리듯 패대기 당한 경험일수도 있겠읍니다. 배신과 실연의 아픔이 쓴 물처럼 가슴속을 역류하는 깊디깊은 외로움을 겪어 보았읍니까?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던 예수님께서 그 보다 더 진한 배신과 고독과 외로움을 맛 보셨읍니다. 애초부터 예수님에게 곱지 않은 視線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읍니다. 유대 종교에 충성했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돌출 행동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읍니다.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서 예수의 전도행각을 멈추게 하고픈 것이 자기들이 사명인줄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았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격이나 비난으로 인해서 고독을 느끼시거나 외로움을 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立身出世하러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요, 人氣나 名聲을 높이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평가나 반응은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읍니다.


 예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두 손 바닥에 박힌 못 자국이 찢겨져 나가도록 예수님을 무겁게 만든 것은 이마에 씌워진 가시관도 아니요, 로마 군병들의 조롱이나 멸시가 아니었읍니다. 날카로운 쇳조각이 달린 채찍질이 그를 아프게 한 것이 아니요,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십자가가 그를 쇠약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기적이 놀랍다며, 하나님의 사람이 오셨다며 '호산나'를 부르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떠나버려 남겨진 터엉 빈자리가 옆구리에 뚫린 창자국보다 더 크게 아픈 상처가 되었읍니다.


 "다 주를 떠나고 버릴지라도 나만은 목숨을 걸고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던 제자들이었지만 험한 십자가 곁에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못한 제자들로 인해 예수님은 그 마음이 찢기도록 고독하셨읍니다.

 다만 그들이 다 떠나버린 그것이 아픔이나 외로움의 전부는 아니었읍니다. 그들이 주님에게 왔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에게 보고 배웠기 때문에 마땅히 깨달으며, 얻었어야 할 그것을 가져가지 못했기 때문에 고독의 아픔은 더욱 큰 것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뒤돌아보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려느냐?"



☆ 고독한 순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를 바로 앞두고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보라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하였지만 그 많은 군중들이 모두 흩어지고 제자들마저도 이제 흩어질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고통과 박해를 받기 시작한 예수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닥쳐 올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극형이었지만 그토록 사랑을 주었던 제자들이 멀어져 갈 때 예수님께서 느끼신 고독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독을 훌륭하게 극복하셨습니다.


 "고독은 단순히 고통일 필요는 없다. 이 고독을 다루는 반응여하에 따라서 오히려 인간에게 창조적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보라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독가운데에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중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러한 고독은 無益한 고독이 아닌 創造的인 고독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고독의 유익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삶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인간 모두의 心理的인 본능의 근거에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장례식을 많이 주례 해본 경험 중에 예수를 잘 믿었던 사람도 생의 마지막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과연 구원받을 자일까? 죽음이 저다지도 두려울까? 하나님나라의 所望이 그 가슴속에 있기는 한 것일까? 하나님께서 지금 저를 영접하시고 계실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경우가 종종 있었읍니다.

 그런데 김할란 이화여대 총장의 죽음에서 그녀는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새 나라에 간다. 그러므로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환희의 찬송을 불러주시오." 그래서 그의 장례식은 영감과 환희의 찬송, 메시아의 할렐루야를 부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장례식을 치뤘답니다.



☆ 고독한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 문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17:1이하)「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하시면서 긴 기도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나 혼자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시작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대화에는 약간의 속임수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때가 있습니다. 위장과 체면이 작용하며 어느 정도는 연극을 하면서 대화를 하므로 진정한 위로를 바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를 다 내어놓을 수 있는 대화자가 있다고 하면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속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내 생각을 아시고 머리털까지 세시는 바 되시는 하나님 앞에 무슨 체면, 가면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주 무리를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고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


 혼자 있다는 것으로 고독과 반드시 동일하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있다하여 고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도 철저하게 고독을 느끼는 사람을 가르쳐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많은데 여전히 고독합니다. 이러한 고독을 loneliness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조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의 고독의 의미를 말할 때에는 solitude라고 합니다.

 '폴틸릭'이라고 하는 현대 神學者는 말하기를

 "고독(loneliness)은 人間實存의 고독이다." "그러나 solitude의 고독은 인간실존의 영광일 수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정적인 loneliness 고독은 고독을 느낄수록 커다란 아픔을 가지게 되지만 자신의 삶을 再創造하기 위한 의미 있는 solitude의 고독은 安息과 創造에 대한 새로운 活力을 얻을 수 있는 귀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피하여 홀로 하나님과 대화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읍니다.

여러분께서도 예수님처럼 나만의 시간 속에서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 대화의 채널을 열므로 삶이 가져다주는 아픔과 고독을 곱 씹으면서 하나님의 위로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화할 내 이웃이 없어도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끊어져도 내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無人島에 버려짐을 받아도 내가 기도로서 대화할 수 있는 영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하면 결코 우리는 고독의 늪으로 잠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독을 낭만적으로 바꿔보세요. 그것을 때론 즐겨보기도 해 보세요.


 고독은 삶을 유익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우리 삶에 창조적인 활력과 거룩한 영광을 위한 헌신으로 가득 차게 하는 촉매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본문(16:33)말씀에「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는 고독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독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고독을 당하셨습니다. 믿었던 아버지까지 얼굴을 돌리시는 고독을 맛보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나「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이 공생애를 막 시작하던 무렵에는, 병들고 소외당하고 인간 대접받지 못하던 변두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 앞에 환호하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와 박해가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의 주변상황을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인 요한복음 16:32 전반에서 제자들을 향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도 주고, 사랑도 주고, 모든 것을 주었던 바로 그 제자들에 의해 배신당한 이 스승의 외로움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사랑했던 제자들이 뿔뿔히 흩어진 후 그분에게 남겨진 것은 십자가의 형극과, 치욕, 처절한 죽음의 고독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냉엄한 삶의 현실 앞에 선 주님의 정신적인 고통과 고독을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계속 읽어보면 놀랍게도 고독은 단순히 고통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고독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오히려 창조적 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고독을 넘어서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여 하나뿐인 목숨마저 끊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이 무어라 하시는지 들어 보십시오. 32절을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이 모든 절망과 고독 앞에 선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입니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과 더불어 우리가 직면하게 될 인간관계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서 떠나가 버립니다. 사랑했던 내 아들과 딸, 情들었던 그이, 정들었던 이웃의 얼굴, 그들이 다 내 곁을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세계가 내게서 다 分離될 것입니다. 이 관계의 斷絶,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나와 함께 삶을 나누던 그 모든 삶의 환경에서 자신이 끊어져야만 하는 고독입니다. 이 단절의 고독, 소외의 고독이 바로 哲學者 키에르 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우리의 삶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줍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홀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 죽어 줄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삶도 내가 사는 것이지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은 이런 고독을 조금은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삶을 나누면서 그들을 통해 받는 약간의 위로가 있습니다. 내 아내가, 나의 자식들이, 내 친구가, 내 주변에 있는 이웃과 교우들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사귀고 정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결국 혼자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가 건너야 할 최후의 다리를 혼자 건너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어떤 낯선 사람이 갑자기 혼자가 될 때, 그것을 남의 사건인 것처럼 바라봅니다. 그러나 나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훌쩍 떠나 간 빈자리를 확인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도 이 떠나감의 사건이 例外는 아니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할 것이 없읍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감격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그 죽음의 외로운 다리를 건널 때, 그 때에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내 아내와 또는 남편이 이 다리를 함께 건널 수 없지만, 이 외롭고 외로운 인생의 마지막 다리를 건너갈 때,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자주 사람들을 피해 혼자 계셨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그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숨결을 느꼈읍니다. 혼자 있다고 해서 반드시 고독한 것은 아닙니다. 혼자 있으면서도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여러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고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군중 속의 고독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와 말씀을 나눕니다. 이런 시간을 경건의 시간, 또는 묵상이라 부릅니다.


시편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1:1-2)


 여러분! 가슴이 답답하고 속상하고 고달픈 고독한 일을 겪으십니까? 그러면 홀로 하늘 아버지 앞에 앉아서 여러분 속에 있는 원망과 좌절, 답답함과 한 맺힌 것들을 쏟아내 보십시오. 말하지 못해서 생긴 병든 마음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 보세요! 병든 마음이 치유되고 치료되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 앞에 자기 속을 털어놓아도 시원한데 하나님 앞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럴 때 고독을 넘어서는 능력이 옵니다. 주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축복이 내 마음속에 담기기 시작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정직한 자기 토로입니다. 내 모든 것을 아시고 내 비밀한 것을 아시고, 그리고 나를 만드시고, 나를 움직이시고, 나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나를 내어 놓는 것, 그것이 온전한 기도요 하나님이 귀 기울이시고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 사리를 통하여 경험해 본 사례대로, 어제까지 인기상승 했던 演藝人들, 또 위풍당당하게 권력을 휘둘렀던 분들,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분들을 곰곰히 과거의 역사 속에서 살펴볼 때, 이 세상에는 부모와 자녀, 부부간, 친구간, 사람과 사람을 결속시키는 매듭 -그 매듭을 인간관계라고 하겠는데- 이 있는데, 늙으면 세월이 가면서 그 매듭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도 結束했던 우리의 삶의 모습이, 매듭이, 하나씩 하나씩 끊어져 버림으로써, 우리들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그래서 끊어진 매듭을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도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現實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權力도 金力도 愛情도 人情도 우리들의 매듭이 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마지막 숨을 거두고 죽어가는 臨終의 자리에서, 최후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만 그 자리에는, 나 혼자 참혹한 모습으로 나 혼자만의 世界에서 이 세상을 떠나야하는 피할 수 없는 宿命을 지니고 살아가는 存在들 입니다.


인생의 價値

◇어느 사람이 시장터에 가다가 옛날 물건을 파는 고상품 가게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문을 열어서 잠깐 거기에 있는 고상품을 보는 가운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화려하면서도 장식품으로서, 고풍어린 디자인이 잘된 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시계는 얼마입니까?”

그런데 생각 밖으로, 그 당시의 시세보다 10분의 1밖에 안될 정도로 쌌습니다.

아, 그럼 하나 주시오.”

사다가 자기 거실에 걸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태엽을 감으려고 하니 태엽이 없는 시계였습니다. 다 고장 난 것을 닦아서 진열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가서 반환하기도 그렇고 하여, 멍청하니 앉아 뇌까려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계는 시간을 보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 시계가 시간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 시계는 한 푼의 가치도 없습니다. 내 눈을 황홀하게 하고, 나에게 기분 좋게, 우선 장식으로 그 순간 기쁘게 하는 것뿐입니다. 시계는 시간을 나타내는, 자기의 근본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다하지 않으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건의 가치는 그 물건이 만들어진 목적에 얼마나 훌륭하게, 적합하게, 내게 충족되어 만족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여러분과 나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내게 맡겨주신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냥 살다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時間입니다. 그동안 반드시 나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전까지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그것처럼 무겁고 참혹하지는 않을 지라도 형태와 모양과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 해야 할 일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어느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짧음을 알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使命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사명에 자기를 불태우고 몰두하십시요. 그러면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부활에 이르는 창조적인 병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세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독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독을 同情하시고 共感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孤獨에서 勝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기신 그분과 함께 창조적 활기가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처럼 여러분과 나도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그런 위대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祝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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