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거듭난 삶 2009. 12. 1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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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갈 6:7-10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언젠가 국민일보에 서울에만 해도 유목민 신자가 2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유목민이라는 것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기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Church Shopping족이라고 부릅니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shopping하듯이 교회도 shopping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신앙을 평가하는 잣대가 교회의 크기나 예배 스타일, 또는 거기에서 내가 유익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내 신앙의 본질이 어떠한가는 관심 밖인 듯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지 않습니까? 한 번 타협하면 계속해서 타협하고 싶습니다. 한번 예배를 빠지면 또 빠지고 싶습니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한 번 게으름 피우면 계속 피우게 됩니다. 그 한 번이 열 번이 되고, 나중에는 그런 생활이 습관처럼 되어 버리게 됩니다. 사람의 육체는 끝없이 안일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닻을 조금만 느슨하게 하면 신앙생활이 점점 안일해집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안일해 질 때 우리의 신앙은 점점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매일 추슬러야 합니다. 힘들어도 추슬러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하나님이 보실 때 내 신앙은 어떠하냐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바르고,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다시 변화하라.

군대 생활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무엇이냐면 처음부터 다시라는 말이랍니다. 그런데 집을 짓다가 잘못되면 고치는 것보다는 다시 짓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설계단계에서부터 잘 기도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작품도 좋은 구상으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처럼 인생도 좋은 구상과 좋은 꿈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젼이 없는 백성, 묵시가 없는 사람은 방자해지고 방탕해 지기가 쉬운데 이는 기필코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이 없이 되는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인 콜린 파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와의 전쟁영웅입니다. 그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사람입니다. 파웰은 뉴욕의 슬럼가인 사우드 브롱크스에서 자랐습니다.

 

청소년시절을 범죄와 폭행과 가난 속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곳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그 지역은 가난과 범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업한 중학교에서 한 교사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이 떠난 이후에도 이곳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을 도와주십시오 라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파웰은 그의 후배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선생님은 편지를 들고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학교에서 콜린 파웰 합참의장이 나왔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 여러분 절대 낙심하지 말고 중퇴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공부하시고 미래를 준비하시오. 여러분들 중에는 판사도 나오고 장군도 나오고 위대한 지도자들

이 나올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의 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편지를 읽고 비록 힘든 처지에 있지만 자기들도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 학교에서는 마약이 없어지고 폭행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콜린 파웰의 이 편지는 인생의 길에서 잘못 가고 있는 학생들을 새로운 길로 가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2.스스로 속이는 인생을 버리라.

오늘 본문은 7절에서 "스스로 속이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서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홀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보로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지만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속이고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결코 변화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대로는 안 돼 나는 변해야 돼', 하는 분이라면 그 분은 가능성이 있는 분입니다.

 

조이너스, 꼼빠니아등의 옷을 만드는 회사의 사주 나산그룹을 일으킨 안정균회장에 대한 얘기를 해 봅니다.

안 회장은 시골에서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와 공사장 인부부터 시작하여 짜장면 배달 등 안 해본 것이 없는 많은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국내 굴지의 재벌회사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모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저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내가 배우고 도움 받을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본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상대했다는 것입니다. 공사판에서 만난 일자 무식꾼에게서도 본받을 것은 겸손하게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도왔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의 길이 잘못된 것을 알면 고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로 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경직된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희박하다고 합니다.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받은 과거의 은혜에 머물러서는 성장하는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이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땅)을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2,3)

백성들이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광야의 삶을 청산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듯이 우리가 믿음의 좋은 선물을 얻으려고 한다면 과감하게 과거를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던 바울의 삶을 보십시다. 그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자들'의 괴수였습니다(행17:6).

그때 당시의 헬라문화의 세력, 로마가 장악하고 있던 3개 대륙인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온통 어지럽게 하고 시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속고 자신이 가장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며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2세기경 기록된 ‘바울과 데크라의 행적’이라는 외경의 기록에 의하면

"대머리에 흰 다리, 눈썹은 서로 맞닿고 코는 매부리에 단신의 다부진 체구"를 가진 호감에 찬 사나이, 그는 인간의 모습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자"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원래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 때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부친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행 23:6).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행22:25-28). 베냐민 지파로 다소에서 출생하였습니다(행22:3).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행22:3) 또한 랍비들이 그러하듯 장막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18:3). 그는 대제사장의 무리들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행26:10). 유대교의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행26:5). 그 열심이 결국 스데반을 돌로 칠 때 동참케 한 것입니다(행7:58). 그의 열심은 정당한 것이었으며 유대 율법주의 전통 안에서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는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을 나름대로 섬기고 위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모든 불의에 대하여 심판으로 종결되고 오직 유대교인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었지만 속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원수로 행동하였지만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일군으로 일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바보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무너졌습니다. 그의 인생이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핍박하던 예수를 따르되 열렬하게 추종하며 따르는 삶으로 180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변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한 평범한 교회 집사의 죽음으로 웅변한 전도가 발단이 되고 다마스커스(다메섹)로 가던 길에 나타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이라고 하는 예수의 한 추종자가 감히 공개적으로 유대교와 그 성전은 이제 끝났다고 공언을 하자, 바울과 그의 동료 유대교인들은 이제 행동으로 처리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체제가 위협을 받는 중대한 현실 앞에서 폭도들을 이용해 돌을 던져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은 그리스도교 광신자들을 잠재우기는커녕 그들의 가슴속에 불을 질러 놓아 더 많은 지역에 흩어져서 그 도를 퍼뜨리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감지한 것입니다. 그중에서 많은 광신도들이 모여 있는 다메섹(오늘날 다마스커스)이라는 나바티안 왕국 내의 도시를 습격하기로 마음을 먹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송환해 올 궁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대를 이끌고 다메섹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생애를 온통 뒤바꾸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놀라운 광채를 본 것입니다. 그 때로부터 바울이 바뀐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그는 유대인으로서 가졌던 희망과 이상들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유대인의 꿈과 이상은 오실 메시야가 다윗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때와 같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와서 새 나라를 세워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국 로마국과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잘못된 세상의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종'이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대적은 눈에 보이는 체제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정사와 권세 즉 사탄과 그의 더러운 귀신들에 대한 싸움(엡6:12)을 위해 영적으로 싸우는 분 이셨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죽음을 이 세상에 가져온 죄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대속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눈에는 미련하게 보였고 크리스챤들이 전하는 하나님이 바보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아는 체하며 나사렛동네 출신 비천한 출생의 예수, 패배자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무리들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스스로 악행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지 못하는 이유를 물어 보십시오. 십자가의 하나님을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렇게 미련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예수님이 답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이제 인생이 변했습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삶을 버렸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이전의 생은 배설물처럼 아낌없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배설물을 버리기 아까워 고이 간직하는 사람이 없듯이 그는 새로운 인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과거를 아낌없이 버렸던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의 사건은 바울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숙소에까지 갈 때,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갔고. 당도한 후에도 3일 동안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신체적으로 환상 때의 강렬한 빛 때문에 맹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예수에 의해 새로운 삶의 길로 접어들었고 전혀 다른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 과거의 눈은 잠시 닫히고 새로운 영안이 열렸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눈을 뜨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 속에서 영적인 세계를 모른 채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눈은 비천한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기 위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잠시 감겨져야 합니다. 앞이 캄캄할 지경을 만나야만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만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는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없지만 철야 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다르게 눈앞이 캄캄하게 막힐 만큼의 답답한 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잠 안자고 울부짖어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예수로 인해 바울은 그 비천한 종으로 왔었던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만유의 주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미래와 또 그의 조국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권리와 통치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부르심에 승복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아그립바 왕에게 이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행 26:19)

바울은 크리스챤들의 믿음을 광신으로 몰았고, 비천하게 여겼던 과거를 청산하고 종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제의 자기는 분쇄되고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 지배당하는 새로운 삶이 전개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로마의 중요한 30여개 도시를 종횡무진 다녔고 약 50년 동안 1만 5000여 km가 되는 거리를 전도하면서 다녔습니다.

그의 소유라곤 집도, 전답도, 그야말로 하나도 없이 일평생을 무일푼으로 살았던 그가 최후에 맞이한 것은 로마의 감옥과 단두대의 죽음이었지만, 그는 그것에 만족하였고 그가 선택한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가 새로이 설계하고 받은 인생은 영원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가 쓴 편지였습니다. 그의 권고를 들어 보십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

그는 영생을 거두는 삶으로 인생의 가닥을 잡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3. 새로운 피조물

사울이 인생의 설계도를 바꿔서 바울이라는 인생으로 거듭났습니다. 바울에게서 일어났던 경우처럼 대체로 모든 크리스챤들에게는 그 비슷한 경험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 중심의 인생에서 하나님 중심의 인생으로 가치관이 전연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미국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신앙만을 위하여 집도 친척도 조국도 모든 것을 버리고 미지의 땅에서 새롭게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 즉 그들 조상들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 차츰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교회마다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 1960 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국회의사당에서 상 하원 의회를 열기 전에 반드시 기도로 시작하였고, 초,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서도 기도부터 드린 후 시작하였습니다. 각 교회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규모는 작았지만 교회학교 교육관은 큰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대지 5천-1만평 정도의 교회 부지라면 교회는 좀 적게 짓더라도 교육관은 매우 크게 지어서 이곳에서 학생들과 교인들의 신앙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그러나 1960년 미 의회에서는

"기도하지 말자. 신앙은 자유인데 왜 강요하는가?" 하며 성경공부와 기도하는 것을 폐지하기로 결정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20년-30년 후 미국은 에이즈와 마약 중독과 도덕성 타락의 위기에 봉착하였고 이에 기독교 단체에서는 "신앙운동, 청교도 정신의 교회로 돌아가자!" 는 표어와 함께 계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기도, 성전, 예배, 믿음을 떠나보내면 뭔가 될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과거 미국은 '성전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전 바깥에 옮겨 심어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새롭게 시작해야 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표가 나지 않지만 심은 것에 따라서 열매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악의 씨가 뿌리워져 있다면 그 열매는 보나마나 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에 예수가 심기워져 있다면 결국은 축복이며 영생입니다.

 

생명력있는 씨를 뿌려야 싹이 나고 잎이 돋고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생명력이 없는 씨앗은 아무리 많이 심는다 해도 싹이 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생명력있는 씨이신 예수를 마음에 심음으로 인생을 새롭게 설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 6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명의 씨앗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4.뒤 돌아 보지 말라.

서양 작가 Oscar Wilde는 '주옥의 단편'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내용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리를 거닐고 계셨습니다.

 

첫 번 거리를 다니는 데, 머리 위에서 술주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났습니다. 쳐다보니 윗층 창문턱에 술에 취한 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왜 그대는 술에 취하여 그대의 영혼을 쇠하게 하는가?" 그는

"주여! 나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고쳐주셨는데 이것 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두 번째 거리를 거닐고 있던 주님은 창녀를 쫓아다니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주님은

"왜 그대는 음행으로 그대의 영혼을 망치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주여! 나는 과거 맹인이었는데 주님이 나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 밖에 할 것이 없어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더 지나가시다가 도시 가운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한 늙은이를 만났습니다.

"당신은 왜 여기서 그렇게 울고 있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나는 죽었었는데 주님이 살려 주었습니다. 나는 우는 일 말고 할 일이 없어서 울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께서 바꾸어 주신 인생을 선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빗댄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이란 무늬만 바꾼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난 것이지요.

 

이는 "위로부터" "하늘로 부터 난 영혼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직 육에 갇혀서 과거의 죄 성에 따라 살긴 하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영의 욕심을 따라 과거의 죄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다시 과거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직 구원에 합당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믿음으로 자기에게 당한 싸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남 유다의 성군이라 할 수 있는 히스기야 왕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가 어느 날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이 병을 낫기 위해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의 병을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한 것은 그의 기도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선대 다윗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셨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다윗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윗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성결하게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축복을 그 자손들에게도 그대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히스기야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부모들의 신앙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있다면 바로, 우리 자녀들뿐만 우리 후손들에게도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등, 신앙의 선배로서 좋은 신앙을 물려받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우리 자녀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이 축복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살았던 다윗이나 바울처럼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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