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거듭난 삶 2024. 4. 25.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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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 한잔

 

마태복음 1040-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참조 : (마가복음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신자에게 환난 많다.

그는 세인에게 불충의 신하, 불효의 자식, 역신, 국적, 악마의 족이라고까지 불린다.

그는 그 집의 사람(가족)마저 적으로서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생애는 십자가이다.

언제나 성애 위해 정애(情愛)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는 전연 고독하지 않다.

, 의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 있다고 동양 도덕이 말하는 대로, 신앙 고독치 않고 반드시 친구있다 이다.

 

신자를 받는 자가 있다. 복음의 사자를 영접하는 자가 있다.

우리들은 단독을 말할 것 아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신자와 이해 영욕을 함께 하시는 일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주는 말씀하셨다.

 

신자와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동체라고 하신다.

얼마나의 영예, 얼마나의 복지랴?

그것을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승리는 이미 내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 하는 까닭에 또 영광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는 신자를 영접하는 자에게 갚아 주신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자이매, 사자를 따뜻하게 대접하는 자의 보상은 하나님 자신 이것을 책임져 주신다. 그리고 사람은 여러 가지 자격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자를 맞아들인다.

혹은 예언자로서, 혹은 의인으로서 혹은 복음의 전달자로서 그를 맞아들인다.

그리고 맞아들이는 자격의 여하에 따라 보상은 다르다는 것이다.

 

전도자가 세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그것은 예수가 미리 말씀하신 대로이다.

사람은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복음의 사자를 예언자로서 맞아들인다.

예수 자신이 그 국인에게 예언자로서 받아들여졌다.

 

예수, 그 제자에게 물어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하시니,

 

그들은 대답하여 말했다.

 

어떤 사람은 침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 또 예언자의 한사람이라’(마태복음 16:13-14)하더라고.

 

하나님의 성지를 전하고, 공의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 성분에 불타는 사람,

죄악을 용서 않는 이, 예수와 그의 사자란 그러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 자격에 있어서 그들을 맞아들이는 자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잘못 않는 것이다.

 

복음의 전달자는 그 일면에 있어서 과연 예언자이다.

그는 죄를 미워하고 악을 싫어한다.

예수의 하신 일에

 

주의 집 위한 열심, 나를 삼킬 것이다’ (요한복음 2:13이하)라는 말씀에 들어맞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예언자로서 전도자를 맞이하는 자는 예언자의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

즉 예언자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침례 요한과 같은 자로 보는 자는, 요한의 제자가 그 스승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감화와 교훈을 예수에게서 받을 수가 있다.

 

하지만, 예수는 예언자인 동시에 또 그것 이상이었다.

그는 죄의 속량 주(구속주)였다. 영생의 공급자였다.

 

그를 단지 예언자로 보면, 불과 그 일면을 보는데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면이라도 보는 것은 훨씬 보지 못함보다 낫다.

 

예수와 그 사자를 예언자로서 맞이하여 이에 상응하는 은혜가 따른다.

사람은 또 허다한 경우에, 복음의 사자를 의인으로서 영접한다.

즉 도덕의 선생으로서 존경한다. 이 또한 잘못된 견해는 아니다.

전도사(신자 전체도 또한 그러하다)는 그 일면에 있어서 확실히 도덕가이다.

 

그리고 도덕가로서 그를 맞이하는 자는 거룩한 높은 도덕에 대하여 크게 그에게서 배운다.

하지만 전도사는 단지 도덕가는 아니다. 그는 죄의 사유의 복음의 전달자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평의 아름다운 소식의 고지자이다.

 

복음의 사자에게서 도덕을 배우고 만족하는 자는, 아직 그가 줄 수 있는 최대 최선의 것을 받지 않은 자이다. 하지만 도덕이라 해도 받는 것은 받지 않음 보다 나음은 만만다행이다.

 

그리스도교 도덕은 최고 최대의 도덕이다.

이것을 배워 허다한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전부를 안 것으로 여기는 것은 괴이히 여길 바 못된다.

 

의인이라는 이유로서 신자와 전도사를 맞이하는 자는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언자로서 뿐 아니라, 또 의인 즉 도덕가로서뿐 아니라 복음의 사자로서 예수의 제자를 영접하고, 이에 냉수 한 잔이라도 주는 자는,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나님에게서 받으리라는 것이다.

 

냉수 한 잔이란 소자선이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배척받은 자에게 호의를 표시하는 일로서 작은 것 같으나 실은 큰 선행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바알세불, 국적, 역신으로 불리는 자에게, 예수의 제자라는 이유로서, 이 약하고 하찮은 자의 한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을 드리는 자는, 반드시 그 보상을 잃지 않는다고, 예수는 힘주어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실제로는 아주 드문 것이다.

세상과 함께 칭찬하고 함께 비난하는 것이 인정이다.

 

그런데, 세론에 반하고, 대담하게 예수의 제자에 대하여 동정을 표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자신에게 쓰이는 것으로서, 그런 자는 그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상이란 무언가 하건대, 예수를 아는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를 아는 것은 한없는 생명이다.

 

도움 없는 예수의 제자를 도와 그 보상으로서 영생의 은사를 받는다고 한다.

냉수 한 잔의 보상으로서는 과대한 듯하대도,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한 보상이라 생각하면, 결코 과대는 아닌 것이다.

 

실로 복음의 사자는 예언자 이지만, 그 위에 예언자 이상이다.

의인 즉 도덕가이지만, 그 위에 도덕가 이상이다.

 

그는 하나님께 파송 받은 평화의 사자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케 하시며,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 하시고,

화해케 하는 말씀을’(고후 5:19참조) 위탁 받은 사자이다.

 

그런 이로서 그를 맞이한 자가 하나님에게서 최대의 은혜를 받으라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