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거듭난 삶 2024. 4. 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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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충돌

 

마태복음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리스도가 세상에 임하신 목적의 하나는 분명히 땅에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의 저녁, 목양자는 천사의 노래를 들었다.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는 은총 있을지어다’.

 

그런데 주는 여기서

땅에 평화를 주려고 내가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검을 주기 위해 왔다고 하셨다.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이 아니다.

평화는 최후의 목적이고, 검은 이에 다다름의 길이다.

 

그리고 그 도상에 있는 때에 신자는,

주의 강세는 검을 가져오기 위함이나 아닌가고 생각하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곳에 면류관 없다는 말 같은 것, 이것을 말함이다.

 

여인, 해산하려는 때는 고통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이전의 고통을 잊어버린다.

세상에 사람이 태어난 기쁨에 의해서이다’(요한복음 16:21)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도 이 일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이다.

 

평화는 고가(高價)이다. 검을 통과하지 않고서, 참된 평화는 오지 않는다.

여기에 검이라고 있음은 전쟁의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종교 전쟁이라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신자가 나아가 칼을 가지고(잡고서) 불신자와 싸운다는 일이 있을리는 없다.

 

누가복음 1251절에 의하면,

예수는 이 경우에 이라 말씀하지 않고 분쟁이라 하셨다고 있다.

 

나는 안전을 땅에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도리어 분쟁케 할 것이다라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412절에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워 사물을 잘 잘라내는 것이 기록되어 있듯이,

 

마태복음의 이 경우에 있어서, 검은 분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홀란드의 공법학자로서 성서학자인 그로티우스(Grotius 5215역주)

이 말을 해석하여 non bellum sed dissidium(전쟁이 아니라, 분열이다)라고 한 것은,

실로 도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오신 결과로서, 사람 사이에 일치가 깨어져 분쟁이 생기는 것은,

신자 누구나가 실험하고, 또 목격하는 바이다.

이것은 실로 부득이한 것으로서, 이 길을 지나지 않고서, 참된 평화는 땅에 임하지 않는 것이다.

 

35: ‘대저 내가 온 것은, 사람을 그 아버지에게 거슬리게 하고,

딸을 그 어머니에게 거슬리게 하며, 며느리를 그 시어머니에게 거슬리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있다.

 

매우 온당치 않은 말이다.

 

거슬리게라는 역자는 지나치게 강하다.

개역의 나누어 질 것이다’ (분열할 것이다)라는 편이 진의에 가깝다.

 

아들을 그 아버지에게서, 딸을 그 어머니에게서, 며느리를 그 시어머니에게서,

나누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원어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은 아들, , 며느리 등의, 보다 젊은이가,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 등, 보다 늙은이와 나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말한 복음을, 새 옷감 또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셨듯 이 설()은 원래 어린 마음에 받아들여지기 쉬운 것이다.

 

고금동서를 가릴 것 없이, 그리스도교는 특히 청년 남녀의 종교이다.

이는 그것이 언제나 생기발랄한 까닭이다.

 

유교가 노야(old man)에게 기쁘게 여겨지고 노녀에게 환영되는 것은 전혀 그 성질을 달리함에 있다.

 

그러므로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서 나누이고, 딸은 그 어머니에게서 나누이기에 이르는 것으로서, 실로 하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한하지 않는다. 모든 진보사상이 그러하다. 개혁은 언제나 청년에서 시작한다.

 

가령 연령에 있어서의 청년 아니라 해도, 마음에 있어서의 청년으로서 시작한다.

실로 나이는 먹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사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우리는 항상 젊어 세상의 노인들과 상대할 수가 있다.

 

37: ‘나보다도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는 자이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예수는 다만 사람은 아니시다.

사람에게 부모 이상의 권위로써 임하는 분은, 하나님의 기능을 갖추신 분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지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대표자, 그러므로 그분만이, 다만 그분만이, 부모에 대한 이상의 복종을 사람에게서 요구할 수가 있다.

 

이는 실로 중한 말씀이다.

먼저 예수가 어떠한 분이신지를 깊이 궁구하지 않고서는 해득할 수 없는 말씀이다.

 

신앙으로 인하여 부모에게서 나뉘지 않을 수 없는 자녀도, 또 그것 때문에 자식을 책하는 부모도, 먼저 이것을 구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후에 쉽게 해결되는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 한다고 한다.

모두 그리스어의 philos로서 agape가 아니다.

전자는 정의 사랑이고, 후자는 도리의 사랑이다.

 

예수는 여기서, 부모 또는 자녀에 대한 정애 까닭에 내게 수종할 (나를 따를) 수 없는 자는, 내 뜻에 합하지 않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실로 그대로다. 아시지의 프랜시스(-7154 프란체스꼬)가 아버지를 떠나고,

루터(2277역주)가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은, 전 인류 위해 가장 선한 것이었다.

 

물론 정은 쉽게 상하게 할 것 아니다. 그러나 도리는 확실히 정 이상이다.

 

금회의 대미 운동 같은 것, 이 명백하신 가르치심에 따라 종사해야 할 것이다.

정에 있어서는 많은 참기 어려운 바가 있다.

그러나 명백한 정의의 도가 유린(trampling)된 그 경우에 우리들은 애정에 끌려 할 일을 피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은 정의 사람이기 보다는 도리의 사람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진리에 거슬러서는 능력 없다. 진리에 따름으로서 능력 있다’(고린도후서 13:8).

 

그리고 나는 진리이다라고 하신 예수는,

 

우리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신다.

오늘의 경우 주님은, 우리들 안의 많은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믿는다,

 

나보다도 미국 또는 미국인을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이다라고.

 

애정은 보다 낮은 사랑이다. 신자는 아가페, 즉 성애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38: ‘그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이다.’

 

십자가 다름없다,

정을 버리고 도에 따르는 일이다.

 

예수의 십자가도 또 다른 것은 아니었다.

정애이냐 성애이냐, 이자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 것인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그 선택 여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평화는 정애에 따르는 일에 의해 얻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성애에 몸을 바치는 일에 의해 주어진다.

 

십자가는 여기에 있다.

이것을 지지 않고서,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및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를 받을 수는 없다.

 

인생은 고통스런 바 있다. 하지만 영광은 십자가 있고서 있다.

십자가이다, 검이 아니다. 악에 견디는 일이지, 이에 대항하는 일은 아니다.

 

악은 자멸적이매, 내 편에서 나아가 이것을 멸할 것 못 된다.

하지만 악에 추종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것을 악이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악의 희생으로 되어 그 절멸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의와 정과,

이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부인과 소아와 소인은 정을 택하고, 위인과 크리스천은 의를 택한다.

 

불인정한 듯이 보이는 의인, 그것이 진정한 사람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그러한 사람일 수 있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