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거듭난 삶 2024. 4. 2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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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침례 요한에게 의심 받으시다

 

마태복음 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참조 : (누가복음 718-23)

 

공중의 새 지저귀고, 들의 백합화 피는 갈릴리 호반의 즐거운 복음 전파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완전한 사람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도 그늘이 비치는 때가 왔다.

그리고 그 그늘은 점점 짙어져, 마침내 겟세마네 동산의 어두운 밤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밤이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늘은 그늘로서, 밤이 오는 예조였다.

 

그리고 빛 휘황(bright)한 예수의 몸에 있어서는 그늘은 얼마나 쓰라린 것이었으랴!

 

하물며, 그 의심의 그늘이, 그를 가장 잘 이해했다고 여긴 침례 요한에 의해 던져진 데 있어서랴!

 

예수는 먼저 그의 친우에게 의심받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제자의 배반에 의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취하신 것이다.

비참하다고 하면 비참하다.

하지만 부활의 아침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요한은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그 제자 두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말하게 하기를,

오실 분은 당신이십니까? 또 우리가 달리 기다려야 합니까.

 

침례 요한이 분봉왕 헤롯에 의해 옥에 던져진 일에 대해서는,

마가복음 614절 이하에 상세하므로,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의를 부르짖은 결과로서, 사해의 동안(東岸) 마케루스 성내(城內)

어두운 뇌옥(prison)에 던져진 것이다.

 

그는 그곳에 매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었으리라.

그리고 그중 가장 큰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서 그의 국인(國人)에게 소개된 예수에 관한 일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예수는 과연 그리스도이신가,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리스도이심의 열매를 올리지 않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는 대능을 나타내어 이방인의 정사를 멸하여, 나라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돌려주시지 않는 것일까?

죄는 의연하여 세상에 발호하는 것 아닌가?

헤롯 안디바(9338역주) 같은 열등의 사람이 왕으로써 나라를 지배하는 것 아닌가?

예수가 세상에 나타나신 이래 그렇다 할 대개혁은 나라에 행하지는 것 없지 않은가?

 

손에는 키를 가지고 그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모아

그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태복음 3:12)라는 것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말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의 하시는 것을 보건대, 이 말에 맞는 것 없이, 의인은 드높여지지 않고, 악인은 처벌되지 않고, 세상은 의연히 죄의 세상으로서 남는 것 아닌가?

 

특히 요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건대, 그는, ()위해 투옥 되었지만도 예수는 그 위해 한 팔꿈치의 힘을 빌려주는 일 없이, 그를 악인이 취급하는 대로 버려두어 돌보지 않는다.

 

이것, 과연 그리스도의 행위로서 볼 수 있는가?

자기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에 소개하신 분을 의심하는 것은 두려운 죄이다.

하지만 의심은 의심으로서 느껴지는 것을 어찌하랴고.

 

요한은 이렇게 생각하여 죄라고는 알면서도 결단하여 두 제자를 보내어, 예수의 해답을 구한 것이다. 그의 심중이란 실로 추찰할 만하다.

 

이 의문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는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는 살아나고, 가난한 자는 복음을 듣는다.

 

말은 간단하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이심의 증거이다.

이것을 듣고, 또 보고서 나를 의심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는 요한에게 말씀해 보내셨다.

그 의미는,

 

나는 기적을 행했다 내 기적을 보고, 내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라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기적은 문제 아니다. 기적을 시행 받은 사람의 종류가 문제이다.

맹인, 절뚝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이것을 총칭하면 빈자들이 고침받고,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이는 확실히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증거가 아닌가?

왕이라든가, 정치라든가, 대신이라든가, 현지사라든가, 학자라든가, 박사라든가, 부자라든가,

고위 고관의 사람이라든가, 그러한 사람이 불고되고, 빈자가 축복된다는 일,

그것이 그리스도 출현의 그릇됨이 없는 증거가 아닌가고?

 

예수는 요한에게 말해 보내셨던 것이다.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아직 침례 요한보다 큰 사람(인물)은 생겨나지 않았다

예수는 후에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최대의 위인 요한이라 해도, 사람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이상도 또한 인간적이었다. 그도 또 오늘의 많은 이른바 그리스도 신자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이 세상의 경천동지(驚天動地)적인 대개혁을 요망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는 그러한 이는 아니다.

그가 눈여겨보신 것은 세상의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빈자 즉 병인, 불구자, 이 세상과 세상의 교회가 무()나 한가지로 여기는 자,

구원을 그들에게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신 소이(reason)이시다.

 

요한은 아직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늘의 신자도 이것을 깨닫기에는 아주 어려운 바 있다.

 

상한 갈대를 꺾는 일 없고, 꺼져하는 심지를 끄는 일 없으시다’(12:20)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다.

 

간혹, 우리들도 또한 요한과 함께 그리스도를 대 개혁자, 대 정치가, 대 활동가로 알아

그를 오해하고, 그에 대하여 실족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감화력은 보편적이다.

그는 세상의 빛인 것으로서 사람으로서 그의 따뜻함을 입지 않는 자는 없다.

 

하지만 그의 감화는 최하층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의 은혜를 입으려 하면, 자신 빈자(貧者)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겸비하여 맹자(盲者)이며 벙어리(dumb person)임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