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베드로가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거듭난 삶 2024. 5. 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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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12-14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9-26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 참조 : 마태복음 2118-22

 

이 기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기적에 비하여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첫째로, 예수의 기적은 대체에 있어서 살리는 기적인데 대하여, 이것은 죽이는 기적이다.

 

둘째로, 봄 아직 일러 무화과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닌데, 열매를 요구하여, 이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여 저주했다는 것은, 이는 무리한 요구인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행위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데가 있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하여, 이 기적은 해석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난해의 주요한 이유는 이것을 단지 기적으로서 보는 때문이다.

 

이것은 기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비유이다. 간단한 기적으로서 보인 비유이다.

 

잎 있어도 열매 없는 나무는 버려진다는 사실로서, 표백해도 실행 없는 신앙은

물리쳐진다는 교훈을 전하시려는 비유이다.

 

이른바 acted parable이다. 행동에 의한 비유이다.

구 신약성서에는 이런 종류의 비유가 허다하게 실려 있다.

 

아가보라는 예언자 유대에서 가이사랴에 와서,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의 수족을 결박하여, 그처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은, 이 띠의 소유주 즉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건넬 것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런 종류의 비유이다.

 

(사도행전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가장 세찬 표현 방식이다. 말로서 하는 것보다도 훨씬 세찬 표현법이다.

 

예수는 여기서 예언자로서, 이 행동화된 비유로써, 예루살렘의 가까운 장래에 대하여 예언하신 것이다.

 

당시 예수의 목전에 가로놓인 예루살렘은 실로 잎 있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였다.

즉 신앙의 외형은 성대 했으나 전연 그 내용을 결여하는 상태였다.

 

성전은 높이 하늘에 치솟아 있고, 의식은 엄격하게 매일 행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 없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었다.

 

회칠한 무덤같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해골과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마태복음 23:27) 있었다.

 

학자와 바리새인들은 입으로는 왕성하게 신앙을 말하고, 전도라 하여 교세 확장에는 열심이었으나, 신앙의 근본인 사랑과 겸손과 자비에는 전연 결여해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번제와 예물보다도 더, 자기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은 알면서도, 예루살렘의 종교가들은 하나님을 모시기에 바빠, 이웃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잊었다.

 

즉 그들은, 잎은 번성해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같았다.

그러한 것은 오래 땅을 덮을 것은 아니었다. 베어 버려져, 불로 사루는 것이 될 것이었다.

 

잎은 번성하여 헛(거짓) 희망을 사람에 주고, 가까이 이에 이르면 아무 몸 보양(保養) 될 것 없다.

 

말과 의식과 교의와 제도는 완비되고, 또 우아하대도, 실행을 결여한 종교는 그러하다.

 

이것은 베어 곧 불사루어 버려야할 것, 그리고 예루살렘은, 잎은 무성하면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저주하신다는 것을 말씀하려 예수는 여기서 이 하찮고 그러면서도 의미 심원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이같이 보면, 나무 한 그루 말랐다고 해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인생의 대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무화과나무 한그루를 없이 했다 해서 조금도 아까울 것 없다.

 

물론 나무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무로서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이 기적의 이유로서 예수를 비난하는 자 같은 것, 신앙의 초보조차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로써 대표된 제자들은 이때, 아직 이 기적의 의미를 모르고서, 예수의 기이하신 능력에 놀랐다.

 

일언으로서 나무를 마르게 할 수 있는 예수의 크신 능력에 놀랐다.

주는 이때, 제자들의 견해가 얕은 것을 책망하시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의문에 응하여, 기도의 효력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

응답되기를 바라면, 이미 응답된 것으로 믿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된 기도는 예언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반드시 이룩될 것을 하나님께 향하여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응답되는 것이다. 응답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기도에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에 결핍된 기도는 응답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는 가르쳐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서서 기도하는 때, 만약 누구를 원망하는 일이 있으면, 이것을 용서하라.

대저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에게 너희도 또 그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효력(응답)있는 기도의 필요조건이다.

이 조건에 결여되어 기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먼저 마음에서 남이 내게 대하여 범한 죄를 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는 때, 기구는 반드시 받아들여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대로이다. 예수의 기도에 대능(大能)이 따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주의할 것은 유대인을 저주한 이 기적도, 또 그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는 제사장 및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시지 않았다.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은,

 

그가 십자가의 위에서 발하신 말씀이었다.

 

우리들은 주께서 교적을 저주하셨다고 읽고서, 우리의 적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공의 위해 악인은 악인으로서 취급되지 않을 수 없다 해도, 그들에 대하여 원한즉 악의를 가져서는 안 된다.

 

하기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행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