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님의 전도적 생애는 3부로 나눌 수가 있다

거듭난 삶 2024. 4. 29.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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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마태복음 211-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예수의 전도적 생애는 이것을 3부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제1은 갈릴리 전도, 2는 이방 전도, 3은 예루살렘 전도이다.

 

3, 전도라기보다 오히려 순교라고 할 것이다.

예수는 백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가신 것이다.

 

마태복음 2017절 이하에 이르기를,

예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때, 길에서 삶을 떠나, 열두 제자를 데리고서, 그들에게 말 씀 하시기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 나를 사죄로 정할 것이다. 또 조롱하고, 채찍질 하며,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이방인 에게 넘겨줄 것이다'라고, 죽음은 예수의 각오 하신 바였다.

 

하지만 예언자는 예루살렘 이외에서 죽임당하는 일 없다’(누가복음 13:33)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그는 예루살렘에 있어서 죽기로 마음을 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갈릴리 및 이방의 전도를 끝마치신 후에,

일부러 스스로 구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이 결심을 기록하여 말했다.

 

예수, 하늘로 들려 올라갈 때, 차려하매, 얼굴을 굳게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려 하셨다’(누가복음 9:51-).

 

보통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서 해득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의 이 수도(예루살렘) 상경이시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구하신 것이다.

 

성도(聖都) 예루살렘에 있어서 죽음의 필요를 느끼신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육의 사람은 지금에 이르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의 사람은 잘 이것을 안다.

 

예수 자신이 분명히 이유를 보여 주시며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사람에게 쓰이고,

또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목숨을 주어, 그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이다’(마태복음 20:28)라고.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예수의 수도(首都) 상경(上京) 만큼 의미심장한 것은 없다.

그 기사의 드라마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인생의 비극희극을 총합한 것이 예루살렘에 있어서의 예수의 최후의 1주간이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수도 입성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 예루살렘에 접근하여, 올리브산(감람산)의 벳바게에 이른 때,

예수, 두 제자를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 매여 있는 나귀가, 그 새끼와 함께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을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약 너희에게 무슨 말하는 자 있으면,

주의 쓸 것입니다고 하라. 그리하면 이것을 보낼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언자의 말에 맞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시온의 딸에게 고하라 너의 왕, 네게 오시도다 그는 유화하셔서,

나귀에 타셨도다 짐을 지는 나귀 새끼에 타시도다 제자가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고, 나귀와 그 새끼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두니, 예수, 이에 타셨다.

군중의 다수는 그 옷을 길에 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무의 가지를 꺾어 이것을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에 가는 군중과 뒤에 따르는 군중은 외쳐 말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에게 복 있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호산나,

지극히 높은 곳에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때,

전부 들끓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누구요라고.

군중이 대답하기를,

그는 예언자 예수이다. 갈릴리의 나사렛의 사람이다라고‘ (마태복음21:1-11)

 

이상을 예수의 개선적 입성식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군중이 옷을 펴고, 푸른 잎을 뿌려, 호산나를 환호하여 그를 영접했던 것이다.

그의 득의(satisfaction) 짐작할 만하다.

 

산치 장군이나 노기 마레스께장군(일본의 육군대장)이 함락된 여순성에 입성할 때도 그랬던 것 아닌가?

 

예수는 이제 다윗의 후예로서 앙도(仰禱) 예루살렘 수취위해 입성식을 행하셨다고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 세상의 임금들의 입성식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예수 자신이 이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수도 상경인 것을 아셨다.

 

그리고 또 그는 군중의 환영을 기뻐하는 그런 분은 아니시다.

세인의 이른 바 공적 승인은 그가 가장 싫어하시는 바였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있어서의 군중의 환영은 예수께서 기대한바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에게 만약 입성식 집행의 의지가 있었더라면, 그것은 그의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행했을 것이리라.

 

그런데 의외에도 군중의 가담하는 바 있어서 그는 적지 않게 마음을 아프게 했으리라.

실로 성자의 눈으로 볼 때, 군중의 만세같이 하찮은 것은 없는 것이다. 예수의 내성(來城)식이었다.

 

정통의 왕은 그 도성을 수취하려 나아가셨다.

하지만 칼 하나 허리에 지니는 일 없이, 병사하나 그의 몸을 지키는 일 없이,

평화의 임금은 일부러 말에 타지 않고, 나귀에 타셨다.

 

그는 유화하여 나귀에 타셨다고 예언자가 말한 대로이다.

실로 우아한, 우러러 존경할 왕이시다.

그에 비하여 이 세상의 왕들은 무색할 뿐이다.

 

예수의 입성식이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그에게 배울 것이다.

 

이기고, 투구 끈을 매는 것으로 족하지 못하다. 이기기 위해 지는 것이다.

위권을 바로 잡아 적을 놀라게 하는 것 아니다.

도리어 겸비하여 약한 것을 보여 두렵게 않는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 때, 유화(宥和)하여 나귀에 타셨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셨다.

 

 

복음서에 있어서의 수난주간

 

예수의 생애 중에 최후의 주간은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복음서 기자가 그 대부분을 그 기사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28장인데, 그중 8장은 이른바 수난주간의 기사이다.

 

간결한 마가복음은 16장 중 6, 37부를 이에 쓰고 있다.

누가복음은 24장인데, 그중 6장은 수난주의 기사이다.

요한복음 같은 것은 21장 중 9, 43부를 이에 할당하고 있다.

 

따라서 안다, 복음서 기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의 수난은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예수는 실로 죽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많은 사람에 대신하여 목숨을 주고, 그 대속물로 되기 위해서이다라고.

그 자신이 말씀 하신대로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