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거듭난 삶 2024. 5. 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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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농부의 비유

 

마태복음 2133-46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참조 : (마가복음 121-12절 누가복음 209-18절 이사야서 5).

 

제사장 및 백성의 장로들이

 

당신은 무슨 권위로써 이것을 하는가? 누가 이 권위를 당신에게 주었던가고 물음에 대하여,

예수는 직접의 대답을 주시지 않았다.

 

다만 물음으로서 물음에 응하여 그들의 반성을 촉구하셨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방법으로서 그가 어떠한 분인지, 어떠한 권위의 소유자인지를 보이셨다.

 

그는 간접으로, 비유로써,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셨다.

이것은 이 경우에 있어서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들은 이 때문에, 곧 손을 그에게 댈 수는 없었다.

동시에 또 그의 대답의 의의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대적을 앞에 두고서 예수께서 취하신 길은 모두 적절하셨다.

죽음에 임하여 여유작작한 그의 태도에 인간의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데가 있다.

 

교회는 포도원, 하나님은 그 주인(소유주), 교직은 이것을 빌려 받은 농부이다.

 

그리고 때가 지나도 농부는 차주에게 임차료(rent)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종종, 종을 보내어 이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종의 한 사람을 매질하고, 한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을 돌로 치고, 또 후에 보낸 많은 종들에 대해 동일한 태도로 나왔다.

 

최후의 수단으로서, 차주는 그의 사자인 한 아들을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것을 기회로 사자(상속인)를 없이하여 전 재산을 자기 손에 넣으려,

마침내 그를 동산(포도원)에서 쫓아내고 죽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는 것 아닌가?

 

종은 예언자, 아들은 예수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교직들은 지금 악한 농부 따라,

하나님의 최후의 사자인 그 외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는가,

 

이 비유에 의해 분명하다, 고 예수는 여기서 제사장 및 백성의 장로들에게 고하신 것이다.

어떠한 대답도 이보다 더 심각할 수 없다.

 

첫째로 배울 것은, 소유주(주인)의 관대하심이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fence)를 두르고, 그 가운데 술 저장처를 파고, 탑을 세우고,

농부에게 빌려주고서, 다른 나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이룩된 완비된 전원(田園)을 농부의 일단에게 빌려주고,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의 행위에 간섭치 않기 위해, 고의로 토지를 떠나 타국으로 갔다.

 

생각하기를 그들은 그의 의기에 감격하여, 잘 전원을 갈고 기꺼이 납공의 의무에 응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 결과는 정반대였다.

농부들은 소유주의 관대를 그의 연약으로 해석하여, 그를 우롱하고, 그에 대해 제멋대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사자를 죽이고, 전원(田園) 전부를 횡령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연 그 (소유주)를 오해했던 것이다. 그는 사랑 때문에 관대했던 것이지, 연약 때문에 관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관대는 의로서 제한된다. 관대한 조건에 더하는데 관대한 수단으로서 해도, 또한 정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의의 심판이다.

 

이들 악인을 죽여 버리고, 제 때에 이르러 그 열매(소출)를 바칠 다른 농부에게 포도동산을 빌려 주신다는 것이다.

 

둘째로 배울 것은, 농부의 뻔뻔스러움이다.

 

그들은 소유주의 사랑에 친압해져, 그 관대를 이용하고, 안심하여 불의를 계속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소유주는 나라에 갔다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리고 포도원은 대여라 해도 실은 증여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소유주의 이름에 의해 납공을 요구함 같은 것, 이는 참월(presumption)이라 할 것이다. 자 우리는 그 사자라 칭하는 자를 죽여 그 산업을 우리의 것으로 하자고.

 

그들은 서로 그렇게 말하며, 그렇게 행했다.

그들은 그 마음에 자기의 죄를 느끼지 않는 것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로는 욕심에 끌려, 또 하나로는 소유주를 업신여기는 나머지 천박한 이유를 붙여, 자기가 욕구하는 대로 행한 그들은 소유주의 사랑을 운위(云謂)했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노하지 않는 절대 무한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가 욕구하는 대로 주인을 해석하고, 제멋대로 그를 취급하여, 조금도 자기의 마음을 책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 주인인 여호와와 그의 사자에 대하여 그렇게 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만사(萬事) 자기들 생각대로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도 또 그 성지를 이루셨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건축자의 버린 돌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시편 118;23).

 

예수는 죽임당했으나 실은 죽임당하지 않으셨다. 그는 이스라엘에 버림받아 새로운 이스라엘의 가장으로 되셨다. 그리고 그를 버린 자는 버려지고, ‘아주 진멸되고’, ‘훼파되고’, 또 깨뜨려졌다.

 

이것은 모두 주께서 하신 일로 우리 눈에 기이한 바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다. 예루살렘의 교직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그 사자에게 그렇게 한 것 같이, 이스라엘은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그 외아들에 대하여 그렇게 했던 것이다.

 

타인의 일을 두고서라도, 일본인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것도 또 이 비유대로이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일에 있어서 일본인은, 이스라엘과 다름없다.

일본인도 또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리스도를 조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같은 보수(報酬)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