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거듭난 삶 2024. 5. 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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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의 계명

 

마태복음 2234-40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참조: 마가복음 1228-34, 누가복음 1025-37.

 

바리새파의 사람들은 헤롯당의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납세 문제로서 예수에게 다가섰다가 그 격퇴하는 바로 되었다.

 

이어서 사두개파의 학자들은 부활 문제로서 그를 시도하여, 도리어 그 계발하는 바로 되었다.

 

최후에 바리새파의 학자들은 구수회의(conference)하여, 마침내 그들의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예수께 질문케 했다.

이르기를 선생이여,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난문제의 하나로서 이것을 예수께 물어 그를 괴롭히려 했다.

성서에 600유여의 계명 있어서, 그 중 어느 것이 크냐하는 것은, 당시의 신학자들의 두뇌를 괴롭히게 한 의제였다.

 

나사렛의 예언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해답을 줄 것인가?

 

하지만 문제는 지극히 명백하다. 실은 이것을 문제로 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이 매조매석(每朝每夕) 되풀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이여, 들으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분 여호와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이것이 제1로서 큰 계명이다. 2도 또 이것과 같다 자기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위기 19:18).

그리고 이상은 율법 부류에 속하는데, 율법에 그치지 않고 예언도 또 이에 준한다.

즉 구약전체가 이상 2개조에 의해서는 것이라고.

 

실로 명명백백하다. 조금도 문제로 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이를 문제로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짓 없는 순정의 사랑은 그러한 명백한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의의도 삽입하지(insert)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에 대하여 말함은 답함이다.

백로(heron)는 백로, 까마귀는 까마귀라고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세상에 자명한 진리를 문제로 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사람은 왕왕 이 과오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남의 결과로서 마음(정신)이 이상해져 그 판단까지가 이상해지는 것이다.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큰가.

우문 이다. 묻는 자의 어리석음을 나타내어 틀림없는 것이다.

 

문제는 명백하다. 동시에 또 심원하다.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함은 단지 하나님은 일위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체로서, 그 안에 분리모순 없다고 함이다.

단지 다신교에 대하여 일신교를 말한 것 아니다. 불완전한 신에 대하여 완전한 하나님을 말한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이나 하나는 아니다. 내게 내심의 분리가 있다.

죄의 사람은 모두 이중인격 또는 삼중인격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조화된 일체로서 일(역사)하신다. 제일이다.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하는 것 속에, 우리의 모든 희망이 담겨 있다.

 

그는 하나인 까닭에, 그 유일한 목적, 즉 전 세계에 있어서의 의의 완전한 실현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마지않으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사랑해야 할 분이시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하나님은 단지 두려워할 것 아니다. 연구하여 탐구할 것 아니다.

제로서 섬겨야 할 것 아니다. 사랑할 것이다.

 

아들이 은애의 부모를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크심에 겁먹어, 그에게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

혹은 그의 거룩하심을 두려워하여, 그를 제사해서는 안 된다.

 

만물의 조물주이신 참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최선의 벗으로서 사랑할 것이다.

실로 깊은 훌륭한, 귀한 계명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전신전력을 다하여 사랑할 것이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마음은 heart로서, 사람의 내적 능력의 전부를 가리키고,

정신은 soul로서, 정성을, (mind)은 지능을, (strength)은 의지 또는 의력을 가리켜 말함이라고.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일체 이심에 대하여, 사람도 또 일체로 되어 그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이 싫어하는 것으로서 2심 같은 것은 없다.

마음만으로 사랑하여 두뇌는 이것을 승낙하지 않음 같은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지성의 합치하여 사랑하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사랑할 분이시다. 전신전력을 다하여 사랑할 분이다.

시인이 그를 칭송하는 때의 마음의 상태도 또한 그것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라’(시편 103:1).

통일된 심리상태로서 하나님께 쓰이라고 하는 것이다.

 

첫째의 계명은 그것이다. 이것을 명시하여 대답은 마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것에 둘째를 가하셨다. ‘자기 같이(제 몸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는 여기서 질문받은 이상을 대답하여, 반대자로 하여금 설 곳이 없게 하셨다.

 

둘째는 첫째에 의해서는 것으로서, 그것보다도 국한된 계명이다.

 

하나님은 전신 전력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즉 자기 이상으로 사랑할 것이다.

이웃을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자애는 죄는 아니다.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으로서 이웃을 사랑할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그가 전도의 처음에 있어서 가르치신 것을 되풀이 하신 것이다.

즉 황금률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상의 수훈의 일절이다.

 

이러므로, 무릇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너희도 또 그같이 하라. 이는 율법과 예언자이다’.(마태복음 7:12)

 

1의 계명은 종교, 2의 계명은 도덕 제2는 실은 제1의 일부이다.

 

하지만 제1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때에 반드시 제2의 형태를 취한다.

도덕은 종교 아니지만 참된 종교는 도덕으로 되어 나타난다.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자기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으로 그리스도교는 전부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가?

오늘의 그리스도계에 있어서도 옛적의 바리새인 중에 있어서 같이

애신애인은 결코 제1의 계명은 아니다.

 

그들은 다른 문제로서 다툰다.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타를 사랑할 뿐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자기의 교회에 들어와, 자기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같은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만족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교는 일목요연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1,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2이다.

기타는 아무래나 좋은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