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거듭난 삶 2024. 5. 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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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관한 논전(論戰)

 

마태복음 2223-3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참조 : 마가복음 1218-27, 누가복음 2027-40.

 

바리새파와 헤롯당의 사람들은

납세문제를 예수께 가지고 왔다가 격퇴되었으므로,

다음에 사두개파의 사람이 그들에 대신하여 그에게 논전(論戰)을 시도했다.

 

사두개파의 주장의 하나는 부활의 부정(不定)이었다.

그들은 부활에 관한 난문제를 제시하여 예수를 침묵케 하려 했다.

 

문제는 신명기 255-10절에 계재되어 있는 모세율의 1개조에 관한 것이었다.

(신명기 255-10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9)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만약 부활이 실제로 있다고 하면,

사후에 있어서 유처자가 무처자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정적 경우이다.

당시의 신학자는 그러한 문제를 논전하여 즐겼던 것이다.

 

후세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었다.

소아가 돼지의 코에 새끼줄을 꿰어 끈다,

돼지는 새끼줄에 끌리는가, 혹시는 소아에게 끌리는가의 중고 시대의 번쇄 신학자가 제출한 문제 같은 것이 그 하나이다.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 없는 문제이다. 만약 나였다면 너무도 바보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에 취급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예수는 심절(深切 kind)하셨다.

그리고 그를 괴롭히려는 사두개파의 사람들 위해 뿐 아니라,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 위해, 특히 또 후세의 우리들 위해, 이 어리석어 보이는 문제를 취급하여, 이에 깊은 뜻 있는 설명을 주시어, 그들과 우리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 취급되어 무엇이든 대교훈의 제목으로 되지 않는 것 없었다.

실로 무비의 대교사이다.

가령 대철 소크라테스라 해도 이 나사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예수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사두개파의 학자들이 이 어리석은 질문을 제출함은, 그들이 성서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신학자, 성서를 모른다고 목수의 아들에게 지적 받았다. 그러한 신학자는 어느 세상에도 있다.

때로는 성서를 모를 뿐 아니라 성서를 경멸하고, 이것을 도외시하는 신학자마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구신약 성서를 깊이 상고한 자는 부활을 의심치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있어서 말한 대로이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 우리의 죄 위해 죽으시고,

성서에 기록된 대로 장사되시고, 3일에 다시 살아나(3-4)

성서에 기록대로 죽음은 이김에 삼킨바 될 것이라는 대로 이루어졌다.(54)’

 

나사렛 예수는 예루살렘의 신학자 이상의 성서학자였다.

그리고 많은 평신도가 신학박사 이상의 성서학자이다.

예수는 이들 신학자에게 교수하여 말씀하셨다.

 

부활이란,

그들이 생각하듯 이 몸 이대로가 살아 돌아오는 일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에 그러한 어리석은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부활 ANASTASIS는 소생이 아니라, 새로이 지음받은 일이다.

사람은 내세에 있어서 금세의 생애를 계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새로운 몸을 받아 전연 별종의 생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아는데, 성서 지식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을 앎의 지식이 필요하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어서 신자의 부활의 신앙을 전복하려고 꾀하는 자를 가리켜,

너희 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있다’(고린도전서 15:34)고 하였다.

 

하나님을 모른다, 성서를 모른다, 그러므로 부활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부활 상태에 들어가, 장가도 가지 않고, 또 시집가지도 않으며, 또 죽는 일 없다.

그것은 천사와 같아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 (누가복음 20:36)고 있는 대로이다.

생식의 필요 없기에 이르러 성적 차별의 필요 없이 되고, 그 때문에 결혼생활의 필요 없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내세에 있어서 금세의 계속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금세에는 이미 진저리를 낸 자이다.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란다. 그리고 이에 맞는 새 생활을 바란다.

2세를 부부로 통정한다고 하여, 금세에 있어서 가진 연애를 내세에 있어서까지 즐기려고 하는 일 같은 것,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 미신의 극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최후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고 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에 대해서는 모세의 글, 가시나무 떨기 편에 하나님 그에게 말하여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을 너희는 읽지 못했는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가시나무 떨기 편이란 출애굽기 제3장이다.

이는 신학자들 누구나가 암송하는 것, 하지만 그 참된 의미를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라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고하셨다는 것은,

지금도 역시 많은 그리스도 신자가 생각하듯,

 

나는 일찍이 아브라함을 지켜 인도한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여호와는 여기서 나는 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

고조하여 읽을 것은 나는 이다의 이자이다. EGO EIMI 나는 이다.

 

하나님,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있는 그대로이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나는 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또 이삭의 하나님이며 또 야곱의 하나님이며라고.

그것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건대, 이들의 열조는 하나님 안에서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조가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로 되는데, 그것보다도 더 세찬 논법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까닭에 그에 의지한 열조는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작별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이르시기를 내가 사니 너희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4:19)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이다라고.

그는 스스로 있는 자’(있고 있는 분), 즉 영원한 실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에 의지하고, 또 그 안에서 사는 자는 그를 닮아 사는 자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가 아내를 다툰다는 것은 배리의 극이다. 실로 너희는 크게 잘못 알고 있다이다.

 

이 명석 심각한 해답에 접하여

사람마다 이것을 듣고서, 그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겼다’(마태복음 22:33)고 하며,

 

학자들, 대답하여 말하기를 스승이여, 잘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감히 예수께 묻는 자 없었다’ (누가복음 20:39)고 한다.

 

이스라엘의 학자로서 그 같이 성서를 해득한 자는 없었다.

오늘에 말하면, 예수는 최대의 exegete였다.

예루살렘을 통틀어 이에 당해낼 학자는 없었다.

 

선생, 잘 말씀하셨습니다.

 

그것 이상 그들은 말할 수가 없었다.

실로 기분 좋은 싸움이었다.

 

*내촌감삼의 십자가의 길을 연재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