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거듭난 삶 2024. 7. 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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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후사(後嗣)

 

성 경: [4:13-15]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17:4-8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17: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의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에 속한 자들 -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 또는 '율법의 체계에 종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 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 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1: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 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2) 믿음으로 자손 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

 

(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 받았던 아브라함의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

 

(28: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이라고 진술했으며,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 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은,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