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거듭난 삶 2024. 7. 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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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의 의미

 

성 경: [4:9-12]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 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 이었다.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7:23-24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24)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이었고)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15: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 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하거나,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

 

(27:65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이와 같이 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 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과,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침례라고 할 수 있다.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 가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 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무할례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 받을 자들''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 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 속에 잘 나타나며,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

 

(고후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8:39), 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