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거듭난 삶 2024. 7. 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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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후사(後嗣) 2

 

성 경: [4:16-17]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음으로'(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 (J. Murray).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 사실이다.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 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까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