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거듭난 삶 2024. 7. 1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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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과 그 결과

 

로마서 53-4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희는 신자 일상의 생활 상태이다.

그는 단좌도를 강의(생각)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유자 같은 자는 아니다.

또 비분강개, 아무 일도 못하는, 우국지사는 아니다.

 

환희는 신자의 생명이다.

 

너희는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너희는 기뻐하라’(빌립보서 4:4)는 것은

 

바울의 말인 것으로서, 또 신자가 서로에 대하여 하는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 벅찬(견딜 수 없는) 환희를 간직하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 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신자는 항상 기뻐하는 자이다.

기뻐할 때에 기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환난 때에도 기뻐하는 자이다.

 

신자는 환희로서 환난에 이기는 자이다.

다만 환난에 견디는데 그치지 않는다, 환난을 기뻐하는 것이다.

 

환난을 어찌하여 못하여 체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유래하는 깊은 이유를 찾아 이것을 이용하고,

이에 의해 하나님께 가까이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신자는 환난을 손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커다란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환난은 신자를 망치지 못한다. 그를 깊이 한다. 환난을 불행이라고 칭하는 자는 불신자이다.

 

신자는 환난을 기뻐한다. 대저 하나님의 최대의 은혜는 환난에 의해 그에게 임하고, 인생 최대의 행복은 환난에 의해 그에게 오는 때문이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달을 낳고, 연달은 희망을 낳는다고 바울은 말했다.

 

환난, 인내, 연달, 희망…… 모두 바울의 독특한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살릴 때 바울의 이 말의 깊은 의미를 맛볼 수가 있다.

 

환난은 단지 고난은 아니다. 아픈 것, 또는 쓰라린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사물이 막다른 곳에 다다름이다.

 

전후에 길이 막히는 일이다. 진토 어떻게도 못할 일이다. 어찌하지도 못할 상태에 빠지는 일이다.

 

그리고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그러한 경우는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빌립보에서 실라와 함께 발에 착고 채워져 옥에 던져진 때, 그는 이 상태에 있었다.

 

(사도행전 16:12이하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그가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에게 속한 대관의 잡는 바로 되어, 광주리로 창에서 성벽 따라 달아내려 그 손을 벗어날 수 있던 때에, 그는 역시 이 상태에 있었다.

 

(고린도 후서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그 자신의 말로서 한다면,

 

우리가 사방에서 환난을 받아도 눌리지 않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진대도 실망치 않고,

박해를 받는대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고,

우리가 어디로 가거나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도다’(고후 4:8-10)라는 궁박한 상태에

그는 몇 차례이랄 수 없이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의 말하는 바의 환난이다.

 

팔방이 막히고, 행로가 막다른데 이르고, 인력으로서 어찌할 수도 없는 상태, ……

바울이 말하는 환란이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인내란 무엇인가?

 

인내는 다만 견디다또는 참는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환난에 처하여 넘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어의 이것을 영역하면 remain under이다.

일본어로 역하면 (아래에 멎는다)이다.

 

떨어질 만큼 떨어져, 그것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서 거기 멎는 일이다.

건축사가 모래 또는 이토암(pelite) 위에 집을 세우려고, 땅을 파내려 가다가 암석 또는 경토에 달하여, 거기에 토대를 놓는 일이다.

 

움직일 수 없는 기초에 달하여 거기 멎고, 새로이 토대를 쌓는 일이다.

그리고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는 것은 이것이다.

 

환난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우리가 의지하지 않아야 할 것에 의지하는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를 의뢰할 때, 세상에 의뢰할 때, 세력에 의뢰하는 때에, 지혜에 의뢰하는 때에,

환난은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우리들이 의거 하는 취약한(무른) 성곽에서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공락되어 우리들은 자기에게로 돌아와(정신차려), 의지해야 할 분에게 부득이 의지하게 되고, 마침내 영원한 반석에 달하여, 그에게 기대고(매달리고), 그 위에 머물며, 거기서 새로이 생애의 기초를 놓아, 썩지 않을, 무너지는 일 없는 한없이 보존되는 바의

 

하늘에서 주시는 우리의 집’(고린도후서 5:1-2)의 건축에 착수하는 것이다.

 

환난은 부서지는 일이다. 그리고 인내는. 부서져 멎어야 할 곳에 머무는 일이다.

개축 위한 환난이다. 그리고 인내는 개축 제1보이다.

영원히 무너지는 일없는 토대의 구축이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께 의뢰하여 생애의 갈 길(행정)에 오르는 일이다,

 

예수의 말로서 하면,

 

비 내리고, 큰 물이 나며, 바람이 불어, 그 집을 친대도, 무너지는 일 없다.

이는 반석을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마태7:25)라는 것이다.

 

그 집을 건축하기 위해,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거기에 새로운 생애의 기초를 정하는 일이다.

 

인내라고 하여, 인종적 불굴은 아니다. 건설적 활동이다.

인내는 연달을 낳는다고 한다.

 

연달로 역된 그리스어의 '도키메'는 넓은 의미의 말이다.

이것을 숙련이라고도, 실험이라고도, 실행이라고도, 또 실현이라고도 번역할 수가 있다.

 

숨은 것이 사실로 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는, 환난에 의해 부서지고 인내에 의해 새로이 기초를 놓은 신앙이, 실험으로 되어 행위로 나타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연달이라고 역하지 않고 실행으로 역한다면, 의미가 더욱 명료해지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내는 실행을 낳는다고 읽을 때, 바울의 이 말의 의미를 일층 깊이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환난에 의해 일단 나의 그릇된 입장을 잃고, 인내에 의해 자신의 서야 할 영원한 반석에 달하고, 여기서 새로이 기초를 정하여 신생의 실행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파괴의 목적은 재건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환난을 내려주시는 것은, 흔들려야 할 것을 흔들어 떨어뜨리고서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12: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환난의 결과가 인내를 거쳐 실행으로 되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환난 위한 환난은 아니다. 파괴 위한 파괴는 아니다.

다시 무너뜨릴 수 없는 신앙의 성곽을 쌓기 위해 내려진 환난의 철퇴였던 것이다.

 

환난에 의해 부서지고, 인내에 의해 지탱되고, 실행에 의해 재축하며, 아름다운 의의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그치는 것 아니다.

 

연달은 희망을 낳는다고 있다. 희망이란 물론 부활 영생의 희망이다.

 

신자는 신앙의 생애를 실행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의 실행은 곧 그로 하여금 위를 우러러 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신앙의 생애에 성공하여 다시 영생을 연모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환난에 의해 그에게 임한 추락은, 인내에 의해 영원한 바위에 달하여 머물고, 여기서 세력을 회복하여 새 생애를 실현하기에 이르자, 그는 지상의 승리로써 만족할 수 없어, 마침내 천상의 영광을 바라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미 위로 올라가셨다면 먼저 땅 아래로 내려오셨던 것 아닌가!

내려오셨던 자는 곧 모든 하늘 위로 올라가신 자라’(4:9-10)고 있는 대로이다.

 

지금 그림으로서, 순서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되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달을 낳고, 연달은 희망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환난에도 기뻐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신앙의 생애의 실험으로서, 이 놀라운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동방의 일본에 있어서, 그로부터 1900년 후의 오늘에,

그의 이 말이 역시 적절하게 우리들의 실험을 말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생애의 실험을 함께 하는 우리들은 실로 복된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