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거듭난 삶 2024. 7. 1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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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稱義)의 결과 2

 

성 경: [5:4-8]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 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

 

(28: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

 

(고전 15:12-16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앎이로다' -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시는) 분이시기에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을 이루어지게 하신다.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아'에는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장래의 구원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이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 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본절의 '부은 바 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케퀴타이'3인칭 단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쏟아 부은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has been poured).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기약대로 - 이는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 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우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5: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 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5:12-13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