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거듭난 삶 2024. 7. 26. 00:10
728x90

신앙인의 내적 갈등 2

 

성 경: [7:18-2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 성도의 신분은 영에 속한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죄를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육신'(사릍스)을 가지고 있는 신분이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죄는 항상 기회를 타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바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누구든지 이러한 현실을 인정치 않는 자는 외식자가 되든지 완전주의자가 될 것이다.

 

외식자는 자신의 잘못을 항상 합리화시키기에 바쁠 것이며,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서 평생 갈등과 고민 가운데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마음은 선한 것을 행하려고 결심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마음의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없다.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이러한 사실은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결심하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을 장악하여 성도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닫고 무력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면 쓸수록 철저한 패배로 인한 비참함만 맛볼 뿐이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본절은 15-18절까지의 진술을 요약하고 있다.

 

(15-18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바울은 지금까지의 진술을 요약 반복함으로써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분명히 어떤 사실에 대한 것이었는지 보여 줌과 동시에 지금까지 고백한 신앙적인 딜레마(dilemma)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본구절은 17절의 반복이다.

그러나 바울이 유도해 내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

 

본절에서는 상반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이라는 조건절이 언급된 다음 본구절이 곧바로 언급된 반면, 17절에서는 본절 상반절과 똑같은 조건절이 16절 상반절에 언급되고

그 다음 17절에서 본구절과 같은 말이 진술되기 전 16절 하반절에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본 구절에서 언급된 말이 16절과 17절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과 연관지어져 있으나 본절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세력에 대한 진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21-2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리고 바울이 17절에서 언급했던 말을 본절에서 다시 반복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심각한 신앙적 현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한편 본절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죄를 짓는 우리의 현실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극복되어야 할 신앙적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본구절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를 우리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일반적으로 바울은 ''이란 단어를 율법에 대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그 뜻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혹자는 이 ''을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세가지 법, ,

 

하나님의 법(22),

마음의 법(23),

죄의 법(23).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본절의 ''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의 원리를 의미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19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바울은 악을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아니라,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 내부에서 잠잠히 있지 않고, 항상 인간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Hendriksen).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속 사람으로는 - 혹자는 23절과 25절에서 대조되고 있는 마음과 육신이 몸과 영, 또는 정신과 물질 간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아니라 윤리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한다(Murray).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와 반대로 혹자는 고후 4:16을 근거로 하여 속사람을 썩어질 겉 사람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Black).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더 나아가 혹자는 속 사람을 인간의 실질적인 자아로서 영(spirit)과 혼(soul)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겉 사람을 사람의 몸과 그 지체로 이해한다(Lenski).

 

여기서 후자의 주장들은 바울의 전체 사상 중에서 인간 이해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시켜 줄 수 있으나 본절 이하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속 사람이 23절과 25절의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구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실체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속사람을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아로 규정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자아와 구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율법'으로 이해한다(Hendriksen, Murray, Harrison, Lenski).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성령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율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속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나 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따르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율법'이나 '계명'을 포괄하는 '거룩한 원리'로 해석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즐거워하되 - '을 즐거워하다'(delight in, KJV). '을 기뻐하다'(rejoice in;Scott, Robertson)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다.

 

또한 이 동사가 1인칭 단수를 나타내므로 '내가 을 즐거워하되'라고 이해해야 한다.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 '지체'(肢體)'육신'과 동일한 의미다.

 

이 지체는 단순히 몸의 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대항하기에 전혀 무기력하며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킨다.

 

비록 '지체', 그 자체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의 지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체'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나 우리의 지체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라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 '마음의 법'22절의 '하나님의 법'에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일으키며 '한 다른 법''죄의 법'과 투쟁 관계에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은 마음 자체에서 일어나는 ''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를 선한 양심 안에서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이다.

 

한편 바울은 '한 다른 법''마음의 법'이 투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싸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성도 안에는 이 두 가지 법이 서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갈등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성도들은 이 두 법의 갈등으로 인한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 '하나님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죄의 법' 역시 어떤 명문화된 법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역사하는 원리 또는 죄의 세력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워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죄의 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성도가 현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실상이다.

 

바울이 성도가 겪게 되는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1) 성도 자신이 현실에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2)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 그런데 여기에는 성도 자신의 실존이 변화되어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이 심각한 도전을 해도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비참한 현실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보는도다'라는 표현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시각적인 경험으로 표현하여 성도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한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스토트(J. Stott)는 본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불신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특정지워 지면 본절과 같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숙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으로 특정 지워지며,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숙된 성도만이 '자기혐오'(self-disgust)'자기 절망'(self-despair)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한다".

 

이와 같이 스토트는 본절을 거듭나지 못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거듭났으며 성숙된 성도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구원을 위한 호소'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호소(Murray)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간의 갈등을 극복케 해 달라는 호소이다.

 

불신자 또는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기 속에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탄식하지 않는다.

 

곤고한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로스'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여 '비참한 사람'(wretched man, KJV)으로 번역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사망의 몸 -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몸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망''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6:23) 죄의 세력을 의미한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이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濾過)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 시키는 분수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