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거듭난 삶 2024. 7. 2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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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 속한 자

 

성 경: [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 '그러나 이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뉘니 데'가 그동안 진술했던 내용보다 한 차원 높으나 반대되는 내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술이라면,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므로 이제'(아라 뉜)는 그동안 진술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 위한 한 차원 높은 내용이 전개됨을 시사하는 접속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본 구절 다음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메 카타 사르카 페리파투신 알라 카타 프뉴마)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 KJV).

 

이 구절이 4절에 반복되고 있으나 다른 사본들(B, D)에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비록 4절이 본절의 의미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 안에 있는 자'만으로도 본절의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오리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과 같은 첨가가 본절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에 의해 한정을 받음으로써 성도가 정죄로부터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해방되었다는 선포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된다.

 

본절에서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는 신앙 고백적인 선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 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성도의 육신을 사로잡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성도는 심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결코 정죄 당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2절에서 34절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2-3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 본 구절을 해석 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난제가 발생한다.

 

(1)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단지 '생명'만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2) '생명''성령'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 두 가지 난제는 함께 얽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따라서 생명은 성령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원리를 가리킨다.

성령은 이 원리에 따라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생명의 성령의 법' 전체를 수식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수식어로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오게 된 원천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죄와 사망의 법 - '율법''정죄'는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율법' 그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할 지라도,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죄는 그 율법을 가지고 성도를 정죄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죄와 사망이 인간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어떤 사본에는 ''() 대신에 ''()가 사용되고 있다.

 

7장에서 바울이 줄곧 자기 자신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보다 ''가 본절에 더욱 어울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7:25절 부터 바울은 일반인 주어로 '우리'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본장에서는 '' 대신 '너희''우리'를 번갈아 가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권위있는 사본들(B, G)''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라는 독법(讀法)''보다 더욱 타당하다.

 

한편 '해방하였음이라'는 표현은 '정죄함이 없나니'란 표현과 일맥상통하지만, 전자는 보다 적극적인 표현인 반면 후자는 소극적인 표현이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은 죄에게 종 노릇하는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 자체의 요구를 이루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7:24와 같은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은 하시나니 -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바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율법을 성취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인하여 - 본절은 '죄와 관련해서' 또는 '죄에 관해서'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Lenski).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본절은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죄의 유혹을 받았고 연약함도 경험하셨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그는 범죄치 않으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던 것이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사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의 유혹과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고, 거룩하신 몸에 죄 정()함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사 인간의 좌와 허물을 대속해 주심으로써 죄 많은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셨다.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 여기서 '육신'은 정죄된 육신을 가리킨다.

 

이미 정죄된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 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또한 인생의 목표를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두는 것이다.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런데 본문은 성도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에게 져서 비참함을 당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바울이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육신에 져서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자 곧 불신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 성도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라 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이다.

 

이 영의 원리에서 가장 근본된 것은 복음이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며 양자 됨과 기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보증을 받는다.

 

따라서 본 구절은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에 대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 - '요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의로운 행동', '계명'(NEB), '규칙'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의로운 요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디카이오마'

'의로운 요구' (the just requirement)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Lenski, Hendriksen, Murray, Stott, Black, Harrison, Barmby).

 

사실상 본 구절에서 '디카이오마'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율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문장이 매우 어색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디카이오마''의로운 요구'로 번역되는 편이 매우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