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거듭난 삶 2024. 8. 19. 00:15
728x90

하나님의 구원 섭리

 

성 경: [9:19-23]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 15-18절 사이에 기록된 내용은 본절과 같은 의문을 제기시킬 수 있다.

 

(15-18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시고 바로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죄인을 강퍅케 하시고 또한 그로 인하여 더 큰 죄에 빠지도록 버려두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책망하며 흠잡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 유기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이나 멸망을 예정하셨다고 해서 이것을 숙명론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가시적(可視的) 규범은 언제나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 속에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Hendriksen).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힐문하다'(안타포크리노마이)라는 단어는 '시비하다' 또는 '계속하여 말대꾸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반대자가 누가 '대적하겠느냐'(안데스테케)라고 야유섞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과 더불어 논쟁하거나 그의 뜻에 대하여 정당성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이는 '감히'(메눈게)라는 말속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쟁하며 법적인 항변(안데스테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Lenski).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 바울은 사 29:16;45:9; 18:1-10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과 동등자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18:1-10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13)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원방에서 흘러 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5)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

16)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 머리를 흔들리라

17)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창조자를 판단할 만한 지혜를 가지지 못한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항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우신 뜻을 따라 선택과 유기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의 선하신 뜻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따라서 사도가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를 다룬 후, 하나의 가상적 질문을 제시한 19절에 대한 답변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마치 전능자를 판단할 충분한 지혜를 갖추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도는 다음절에서 토기장이와 진흙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단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리와 능력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결정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할 뿐이다.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 이것은 구약의 대표적인 두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의해서 사용된 예화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아울러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처럼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무익한 것이냐'라는 존재론적 운명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빠질 위험에 봉착한다.

 

그러나 바울은 19, 20절에서 이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바른 태도는 순종과 헌신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이 귀하게 만들었느냐 천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실 때에 자유하다는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강조점이 있다.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논증한다.

 

죄인의 형벌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자주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다.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고의적으로 조성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지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관여하신다.

 

특히 그의 인내심은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시며, 또한 회개한 자를 기꺼이 용납하고자 하시는 증거이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따라서 본절에서 '멸하기로 준비된'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끝내 무시하고 심판에 직면하는 죄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arrison),

 

'준비된'(카테르티스메나)이라는 말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준비되었으며 그의 멸망의 때는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멸망을 준비한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그가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한 행동에 대한 형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Hendriksen).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범죄한 죄로 인하여 멸망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Bruce).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시고 안 택하시느냐? , 택함을 받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이냐? 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두가 죄인인 상태에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마음에 합당한 자를 일부 구원하신 것이지 근본적으로 누구는 조금 낫고 누구는 조금 못한데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처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고,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반면에 멸망 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본래 죄값으로 멸망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죄인인 인간 편에 있음을 보여준다.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본절은 22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쪽에 사용된 상징적인 표현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만,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富饒)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를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그들이 초래한 결과는 전혀 다른 신분을 만들고야 말았다.

 

'긍휼의 그릇'들은 '진노의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을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다.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본절의 '영광'은 개인의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Hendriksen, Barm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