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이 그릇은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거듭난 삶 2024. 8. 2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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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 섭리 2

 

성 경: [9:24-29]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바울은 은혜의 충만함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임하였음을 선언한다.

 

'긍휼의 그릇'23절에서 '진노의 그릇'이 완고한 유대인들을 칭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모든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23절의 '예비하셨다'(프로에토이마센)에서 암시된 약속은 '부르셨다'(에칼레센)라는 선언 속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바울이 유대인들을 전체로 묘사하지 않고, '중에서'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효적(有效的) 소명으로서 참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6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또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참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 세우심을 받는다(Hendriksen).

 

결국 바울은 '긍휼의 그릇'이라는 개념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초월하여 오직 성령의 내적 소명에 의해서만 형성되어지는 참 이스라엘, 즉 우주적 교회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1:13-16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2:10-11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3:22-24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4:11-12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 바울은 이방이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을 호 2:23을 인용하며 논증한다.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호 2:23은 이방인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고멜의 방탕과 같은 죄와 형벌 속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호세아는 고멜의 방탕 중에 잉태한 네 자녀의 이름 중, 두 자녀의 이름을 '로루하마'(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사하지 않을 것),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는 상징적 의미로 지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함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셨다(F.F. Bruce).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바울이 초대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당시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베드로도 벧전 2:10에서 호 2:23을 이방 신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와같은 적용은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원리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음을 시사한다(Hendriksen).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불러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 본절은 호 1:10의 인용으로 혹자는 앞절과는 달리

본절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Barmby).

 

(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때, 이 호세아서의 예언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원리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는 것은 동일한 예언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본절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endriksen. Harrison).

 

이방인들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화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창조자의 영광 속에서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묘사된 반면,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유대인들은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묘사돼 있다.

 

유대인의 구원은 더 이상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야곱의 자손 중에서도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남겨진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Kasemann).

 

사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의 글은,

 

(10:22-23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당시 이스라엘의 위치 속에서 백성의 보존을 예언한 글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앗수르에 멸망한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떠난 이스라엘 유대 민족 중에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시사한다(Hendriksen).

 

따라서 '남은 자'에 대한 이사야서의 예언은 구별된 유대 민족들 중에서도 연단(鍊鍛)의 심판을 통해 그 수효가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Harrison), 또한 하나님의 긍휼과 신실성을 더 크게 나타내는 구약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더 큰 구원의 약속을 발견한 것이다.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 10:23에 대한 인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표명한다.

 

(10: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는 '남은 자'의 구원이라는 사상 속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될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중에 남은 자를 회복하신 것과 같이, 완악한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과 심판도 절대적으로 성취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에서 그 성민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히 멸망 당한 대표적인 성읍들이다.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19:23-28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29: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

 

50:4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무너지게 한 것 같이 거기 거하는 사람이 없게 하며 그 중에 우거하는 아무 인자가 없게 하리라;

 

4: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 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절에서 유대인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비유한 것은 유대인들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심판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완악한 유대 민족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를 남겨두신 것은,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지만 보다 강조점을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상황 속에 적은 자를 남겨 두셨다는 사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씨, '남은 자'(the remnant)들을 남겨 두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선민(選民)은 고사하고 제 2의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저주받은 민족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선민이라고 자처하며 구원의 독점성을 주장하던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실상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죄악의 심층부에 자리한 소돔 고모라 사이의 윤리성을

사실상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되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돋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