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내가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거듭난 삶 2024. 8. 1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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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성 경: [9:14-1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은 에서를 유기(遺棄)하시고 야곱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이 다 잘할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의 다 자람을 지켜보시고, 또한 그들의 업적과 공로를 다 살피신 후에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면 진정한 선택과 유기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Harrison).

 

실로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에서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야곱 조차도 결코 선택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축복은, 행위와 업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약속의 씨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더 큰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선택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 본절에서 '불의'(아디키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인지 또는 그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속성이나 행위에 있어서 '불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어 '아디키아'는 어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법적인 불의를 뜻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보다 근본적인 근거에서 창조주의 의의 개념을 제시한다.

 

(20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다시 말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거나 유기하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불평등한 것이나 잘못된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 바울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 곧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선택하시고, 애굽을 유기하신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선택의 절대 주권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인용한 출 33:19 당시 상황을 이해한 후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이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용서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

 

(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였다.

 

,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그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는 '작정'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J. Calvin).

 

그러므로 출 33:19의 내용을 인용하여 인간에게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자비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는 결코 값주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인 것이다.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원하는 자'(델론토스)'달음박질하는 자'(트레콘토스)는 앞에서 언급된 에서와 야곱뿐만 아니라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트레코'('달리다', '경주하다')라는 단어를 긍적적인 의미로서 고대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묘사할 때나,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였다.

 

(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본절에서는 보다 사실적인 의미로서 모세의 소원과 민족을 위한 노력들 마저도 아무런 칭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Meyer).

 

아브라함과 모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경주로 구원을 이룰 자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달음박질조차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여기서 다시 논리의 전개는 유기(遺棄)의 표본으로 세워진 바로에게로 넘어간다.

 

바울은 '성경'(헤 그라페)을 의인화시킴으로 당시 바로에게 직접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적 의지를 보다 생생하게 상기시키고 있다(Bruce, Harrison).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 '세웠으니'에 해당하는 '여세게이라'70인역에서는 '디아테레오'('지키다', '보존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인 '디에테레데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능동태 1인칭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예정 의지를 보다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70인역과는 달리 '여세게이로'('내가 일으키다')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변형시킨 것은 단순히 70인역을 번역하지 않고 보다 원문에 가까운 뜻을 찾기 위함인 것 같다(Bruce).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단순히 존재케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겨두셨다(Hendriksen. Harrison. Ridderbos).

 

역사상에 나타난 바로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가는 악행을 범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 구원을 더 영광된 것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J. Calvin).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영광을 위하여 죄를 조성하였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본절의 핵심은 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것은 하반절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이 바로를 왕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창조주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시기 위함이다.

 

'능력'(뒤나민)'이름'(오노마)은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눈에 드러나는 이적적(異蹟的)인 기사들은 하나님의 속성 곧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Kasemann).

 

실제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은 그 이후에 다른 모든 민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10-1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9: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삼상 4: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 -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가 강퍅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긍휼을 입었다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행위는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원하는 자'(델론토스)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의 원하는'(델레이) 바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긍휼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의 판단은 인간의 거짓된 생각들과는 달리 항상 참되시며 공의로우시다.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면서 바로와 관련된 삽화를 종결시키고 있다.

 

강퍅케 하시느니라 - '그가 강퍅케 하셨다'(스클레뤼네이)라는 표현은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디아테레오)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강퍅케 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문자적 의미보다 그의 죄악과 본성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이것은 본서의 1장에 서술된 원리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는 스스로 마음이 완악해지고 또한 스스로 더 큰 죄악을 범함으로 인하여,

 

(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8:19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돌이킬 수 없는 심판에 이르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완고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도 아니하셨으며 또한 고의적으로 그의 죄악을 조성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더 큰 죄와 완악함을 만들어 낸 것이다(A. Bar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