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거듭난 삶 2024. 8. 2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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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로 의를 추구

 

성 경: [9:30-3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 표현은 14절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4절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반대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의미로 쓰였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나니 -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철저한 율법 속에서 의의 성취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버림받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죄악을 무시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된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받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직 믿음에서 난 ''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흑암에 거하던 이방인들 속에서 복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그들의 믿음으로 성취되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음에서 난 의요 - 이방인들이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방인 속에는 어떠한 윤리와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못한 윤리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거나, 또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 ''의 개념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asemann).

 

유대인들이 ''의 성취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였으나, ''의 성취는 불행하게도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약속의 자녀요, 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이다.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잘못된 의를 추구한 데 있다.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를 추구하였으나, 율법을 그릇된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개인의 의를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써는 의를 성취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의 의는 육체의 법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성취되었다.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편 바울은 '좇다'(디오콘)라는 단어를 경주(競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여 유대인의 열심있는 경주는 결국 이방인들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Harrison).

 

이방인의 승리는 그들이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믿음으로써 의가 주어졌다는 칭의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폭로한다.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이 인용문은 사 28:16, 8:14의 내용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말씀이다.

 

(28:16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8:14 "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바울은 이 두 구절의 핵심을 매우 능숙한 솜씨로 배합하여 한 문장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은, 8:14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인 '거치는 돌'이 바울의 인용문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복음은 거치는 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그들에게 구원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반석으로 묘사하고 있다.

 

(8:13-15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석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오히려 그 반석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서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제시된 복음은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넘어지는 돌이 되었다(Bruce).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행위의 율법을 자랑함으로써 스스로 함정과 올무에 빠지게 된 것이다.

 

행위를 자랑하고 말씀과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유대 민족들은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과 십자가를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페트란)은 시편 118:22에 기록된 '버린 돌',

 

(시편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8:16에 기록된 '시온의 기초 돌'로서,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20: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이것은 또한 단 2:34절에 기록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이는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2: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돌은 멸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돌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을 선포하는 피난처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돌을 거침돌로 만듦으로서 스스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들은 행위와 그리스도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으나 십자가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Harrison).

 

여기서 바울의 결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Hendriksen).

 

믿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피난처이신 시온의 반석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