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거듭난 삶 2024. 10. 3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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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요한의 출생 예고 3

 

성 경: [1:12-16]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놀라며 무서워하니 -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다.

 

(6:22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13:22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 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와 비교해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 과거의 형태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천사의 응답은 그 내용을 추정 가능하게 한다.

즉 그의 기도 내용은 자식이 없는 자신을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 이상으로 응답하신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시아도 곧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가랴에게 임한 축복으로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5:16)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 해 준다.

요한(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 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벨론 포로생활 시기를 전후해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

 

이 부분은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즐거워하다'로 번역된, '아갈리아시스'가 연이어서 나오는 문장이다.

 

'아갈리아시스''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한다.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 앞에 큰 자 - 이 말을 32절의 예수께 대해 큰 자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32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수식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요한은 예수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억할 수 있다.

 

(6:3-4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메시지와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소주에 해당하는 '시케라'는 강한, 독주 등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이 부분은 앞부분의 포도주와 소주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의 성령 강조이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중 본장에서 4회가 사용되었다.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회나 사용하고 있다.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3:7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9: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

 

(3: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