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거듭난 삶 2024. 11. 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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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가(醫家)의 증명

 

누가복음 126-38: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 같은 일은 오늘날 일소에 붙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불신자에 그치지 않고, 신자까지, 지금은 진지하게 이 문제를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 신경에

'주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있어,

교회는 일요일마다 이것을 부르지 만도,

오늘 평신도를 비롯하여 목사,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이것을 믿는 이라고는 비 오는 밤의 별 마냥 드물다.

 

그들도 말하는 것이다.

 

'늘날 과학의 진보에 의해 그러한 것은 전혀 믿을만한 것이 못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가령 이 신조가 없어진대도 그리스도교는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교훈, 그 인격이 남는 한은, 그의 출생의 방법 등은 물론 필요 없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은 많은 성인의 출생담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신자가 조사(개조)를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한 데서,

절로 생겨난 신화로 보아, 별로 차질은 없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여 쉽게 풀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실로 버리기는 쉽고, 얻기는 어려운 바 있다.

의심하기는 쉽고, 믿기는 어려운 바 있다.

이것을 일소에 붙여 돌보지 않기는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1900년의 오랜 동안, 굳게 신자 사이에 믿어져 온 이것은,

깊은 연구 없이 쉽게 방기될 것은 아니다.

세상에 식자로서 지금도 이 신앙을 견지하여 동하지 않는 자 있음을

크게 주의해야 할 일이다.

 

1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을 전한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의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인(헬라인)으로서 의사였다.

 

(골로새서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리고 그리스 당시의 의사는, 오늘 오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지 무학의 사람은 아니었다.

모든 학문이 그리스인으로서 시작한 것 같이, 의학도 또 그들로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철학사상이 융성을 극한 당시의 의학은, 미신을 사실로 아는 그런 것은 아니였다.

 

누가는 고등 교육을 받은 그리스(헬라)인이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흐름을 따른 의학자였음과 동시에, 또 헤로드토스(3290역주'의 자취를 따른 역사가였다.

그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어느 방면으로 보나 훌륭한 역사이다.

 

그리고 이 역사가가 그의 저작의 벽두의 서문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서 독신 된 것을, 처음부터 친히 보고 말씀을 위해 일한 분이 우리에게 전한 대로 써놓으려고,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손에 잡았습니다.

 

따라서 귀하신 데오빌로여,

나도 또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조사했으므로,

차례대로 당신에게 써 보내어,

당신이 배운 바가 확실한 것임을 알게 하려 생각했습니다.'(누가복음 1:1-4일역),

 

이는 누가복음이 저술된 목적이다.

이것은 기사의 출처를 거슬려 올라 깊이 연구를 거쳐 후에 이룩된 저술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조사했으므로'라고 있음은 이 것이다.

 

누가는 여기서 소설을 지으려 한 것은 아니다.

진지한 역사를 쓰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의 노고를 아끼지 않고

연찬(study) 고증(research)의 결과로 이룩된 것이 누가복음이다.

 

과학적 교육을 받고, 사학적 관찰력 풍부한 이 사람에 의해 이룩된 이 역사는,

그가 이것을 세상에 주고자 한 그 정신으로써 받아들여져야 할 것으로서,

실로 고대역사 중 아주 신뢰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적 저작은

즉시 그리스도의 출생에 관한 기사로써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왕 헤롯 때에, 아비야의 조인 제사장 사가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여,

 

시대를 말하고 인물을 말하여 순수한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서문의 명언에 의해 고구를 거쳐 된 역사임을 증거하고,

그리고 기사 그것에 의해, 그의 서언이 결코 공언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에 주의하지 않고서,

126절 이하의 처녀 마리아의 회태(懷胎)에 관한 기사를

신자의 미신으로 된 신화로 볼 때면,

저자의 서문은 곧 부당한 것이 되는 것으로서,

서문은 도리어 저자의 불성실을 증거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저술에 종사하는 자는 누구 나가 아는 것이다.

저서에 있어서 가장 귀한 부분은 그 제1장이다.

저자의 정신, 그 목적, 문체의장, 모두가 제1장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의 일에 뛰어났던 누가가 이것을 모를 리는 없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살피고 기록했다고 하면서,

그의 저서 제1장에 있어서, 더구나 서문에 이어서,

역사 대신 신화 또는 소설을 기록하여,

그는 전연 그의 저작을 파괴해 버린 것일지?

 

그런데 누가가 그러한바 상식의 사람이 아니었음은 누구 나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래 그리스도 출생에 관한 기사를 사실로 보지 않는 것은,

누가 및 누가복음의 신용에 관한 대 문제이다.

 

누가의 말을 중히 여기고, 누가복음 전체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는 자는,

부득이 제1장의 기사를 사실로서 인정하기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가 역사안(歷史眼)을 갖춘 사람이었음은,

 

냉정한 역사가, 특히 영국의 W. 램지, 독일의 하르나크(8421)등이 한가지로 인정하는 바이다.

 

4복음서 중, 근세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역사적인 누가복음이다.

그리고 이 누가복음이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의 기사로써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학상 간과(overlooking)해 버릴 수 없는 대사이다.

 

사학의 정칙을 모르는 자는, 그러한 것을 소사로 볼지 모르나,

참된 사가는 자기의 신앙 여하에 의해 사학상의 대사를 좌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옳다. 그는 이것을 좌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윌리엄 램지 같은 사학의 태두가, 그의 전문의 입장에서,

누가의 기사를 사실로서 채용하기에 이른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사가가 사학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말하는 것이다.

 

'누가는 의학자라 해도 1900년 전의 의학자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을 오늘의 의학에 비교할 때,

소아를 대인에 비교함의 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의 증명은 오늘에 이르러서는 의학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굳이 누가의 성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1세기에 있어서의 의학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 같은 것,

20세기의 오늘의 의학의 입장에서 볼 때 황당무계(absurdity)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근세 의학의 대표자로서 누가의 기사에 관하여 가장 유력한 증명자가 있는 것이다.

 

닥터 켈리(Howard A. Kelly)라고 하면,

미국 죤스 홉킨즈(Johns Hopkins) 대학 교수로서 세계적 명성 있는 의학자이다.

그는 외과 의술의 세계적 권위이다.

독일 학계에 있어서는 미국의 학자라고 하면 전체로 경멸하는 것이 보통인데,

저 닥터 켈리에 이르러서는 예외이다.

켈리 씨의 학과 술은 대서양 양안모두 한가지로 인정하는 바이다.

 

외과 의술의 조예 깊은 사람으로서 세계에 이 사람에 지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켈리 씨가 특히 산과의로서 최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이다.

의학자로 더구나 산과의, 이 산과 의학의 세계적 권위(authority)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을 확신하고, 이것을 창도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그는 191510월 발행의 '우리들의 희망 Our hope'라는 잡지에 투서하여,

명백하게 이것에 관한 그의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물론 이것에 관한 의학상의 설명을 주고 있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이다.

하지만 의사로서의 그의 입장에서 동업자 누가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주로서 그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누가가 기록한 것 같은 방법에 의해 태어남의 필요 있었음을,

대답하게 또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내게 있어서 주 그리스도는 아닌 것이다.

가령 그가 세계 최대의 교사라 해도,

그것 뿐으로는 나는 지금도 죄 중에 있는 것이다.

 

죄인인 나는 어떻게 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불사른바 되는 일 없을는지의 초미(위급, imminence)의 문제에,

나는 그대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켈리씨에게 이 예민한 양심 있어서,

그는 그의 해박(profundity)한 의학으로서도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을 신수(信受)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 누가와 닥터 켈리, 그리스도의 기적적 출생을 전한 자는 의사,

그리고 의학속진의 오늘, 이것을 주창하여 주저하지 않는 자도 또한 의사이다.

 

청년이여, 소신학자여,

그대들은 쉬이 학자의 비평을 듣고서 그대들의 신앙에 동요를 가져올 것 아니다.

학문 위에 학문이 있다.

그리고 깊은 학문은 언제나 신앙과 일치한다.

 

*내촌감삼의 글에서 (19161217, 성탄절 준비 강연으로서 말한 것)

(19171'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