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거듭난 삶 2024. 11. 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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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요한의 출생

 

성 경: [1:57-66]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1: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앞에서는 침례 요한과 예수의 수태에 관한 기사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그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본 구절은 5-25절에 이어 침례 요한의 탄생 기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1: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함께 즐거워하더라 - 지속적인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기쁨은 엘리사벳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모두의 기쁨으로 옮아갔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탄생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바, 본 구절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기도 하다.

 

 

[1: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할례(割禮)하러-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았는데, 구약 시대에 이 할례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 였다.

 

1.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

2.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3. 여호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표.

4. 신약 시대의 침례에 대한 예표 등.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신체적으로만 할례를 받는 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소위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었다.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44:7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며).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 생후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때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다.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2: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따라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야곱이 이스라엘로,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혹은 사울이 바울로 칭하심 받게 된 때는,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또한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

 

(4: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한 풍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했으며,

 

(2:19-20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 확보와 동일시되었다.

 

(삼하 12:28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그리고 여자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자의 이름으로 칭해지길, 즉 남자의 보호 아래 놓여지길 구했으며,

 

(4:1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

 

하나님의 보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함 받다'라고 표현되었다.

 

(63: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1: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아니라 요한이라 - 엘리사벳은 자신의 반대가 관습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또 여자의 견해라 하여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아니라''정말로, 절대로 아니다'는 뜻이다.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몇몇 주석가는 그녀가 남편 사가랴 처럼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한다.(Meyer, Bengel).

 

그러나 그보다는 엘리사벳이 필담(筆談) 형식을 통해 사가랴가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전해 받아 알았을 거라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Bruce, Plummer, Lenski).

 

한편,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 '요한'이라는 이름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서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2.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3.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였다.

 

(3:10-14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3:5-6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1: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 친척과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가문에서건 전승되는 이름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가문 중에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계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친족들은 관례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짓기를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지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므로,

 

(15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의 위대한 생애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였다.

 

 

[1: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

 

당시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2절에서 누가는 '사가랴가 벙어리대로 있더니'라고 말하지만, 사용된 단어 '코포스''벙어리'뿐만 아니라 '귀머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서판(書板) - 표면에 밀랍(wax)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little-tablet)으로서 그곳에 첨필(尖筆)로 글을 썼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에 대해서 사가랴의 의견을 물었을 때, 사가랴의 대답은 '요한이라'였다.

 

이것은 사가랴의 의견이 아니었다.

이것은 계시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사가랴가 귀머거리였음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만일 사가랴가 엘리사벳과 주위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었다면 부인 엘리사벳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

 

사가랴의 믿음 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결실을 맺고, 자신의 불신의 표적(sign)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풀려나게 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의 말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가랴는 그 혀가 풀리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찬양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68-79절의 내용뿐만 아니라,

 

(68-79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며, 지난 10여개월 동안 말 못했던 답답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크나큰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이다.

 

아마 그는 장장 10여 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에 대해 뉘우침과 아울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도리를 절실히 배웠을 것이다.

 

 

[1: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다 두려워하고 - 이는 '공포'가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이다.

 

(12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진 일을 목격한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의미이다.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한정된 지역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때때로 그 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유대 본령(本領)은 한 면이 약 70km되는 거의 정방형(正方形) 모양이었다.

유대는 특히 '산지'로서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요새지가 600m에서 1,004m에 걸쳐 있다(헤브론의 북쪽). 이 지역은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광야' 또는 '사막' 지대로서 샘이 거의 없어 항상 인구가 적었다.

 

한편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바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산간 지역 일대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교역상(交易商)들이 항상 유대 주위를 통과했는데 이 교역상들을 따라 이 이야기가 점차 유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1: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마음에 두며 - 헬라어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문 또는 낭설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이다.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 이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섞인 물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은 구절, '주의 손'이 이 질문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손 - 구약은 창조에 있어서나 역사진행 과정에 있어서 자주 하나님의 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로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은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은 개개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

 

(왕상 18: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덧입히시며 돌보심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