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도래
누가복음 2장 24절 :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과거 4년간, 파괴 격침 등의 피 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매일 전한 세계 전쟁(제2권말 특별부록 참조)도 마침내 종식(end)하여, 올해(1919년)는 다시 평화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인류는 이제는 영원한 평화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다.
이때에 있어서, 우리들 전쟁을 증오하기 그지없어 하는 자는, 이 기대에 대하여 만강(전적 whole)의 동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결단코 천박한 해석을 내릴 것 아니다.
우리들은 평화가 어떻게 하여 올 것인가에 대하여 성서의 가르치는 바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을 알려고 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은 인류의 사상으로서 성서에 임해서는 안 된다.
성서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 성서에 배우도록 하라.
성서는 세계 평화의 도래를 어떻게 보는가?
만약 성서의 보는 바가 인류의 사상과 어긋난다면, 우리들은 다만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버려야 할 뿐이다.
오늘의 사람은 너무나, 미국 대통령 기타 인간의 말을 중히 여기고 성서를 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성서에 복종하라. 성서에 사로잡힌 바 되라.
성서는 어떻게 하여 세계 전쟁이 절멸될 것을 가르치는가?
평화의 도래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성서의 말씀의 하나는,
누가복음 제2장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의 노래이다.
이것을 역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하나님께 있을 찌어다.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는 은혜가 있을 찌어다.'라고 한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이는 천사가 와서 노래한 노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 일본 역사에 있어서 스가와라 미찌자네(관원도진)의 원령, 어느 때 뇌명 중에 하늘에서 칠언절구의 시를 노래했다는 것 같이, 명료한 문장은 하지 않은 것이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의 사자가 짧은 시간 사이에 대 진리를 전한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하늘에서의 전보 같은 것이다.
날마다의 신문 지상에 발표되는 외국 전보는, 발신자에게서 받은 주요한 어구를 기초로 하여
수신자가 그 의사를 상상하여 이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천사의 노래도 역시 극히 간결한 것이었으리라.
누가는 성령에 의해 불과 11자를 가지고서 이것을 번역하고, 잘 그 뜻을 전한 것이다.
즉,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하나님께 땅 위에는 평화 사람 가운데는 호의'라고.
그리고 옛 사본에는 eudokia(호의) 다음에 s를 붙여 eudokias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은혜의 사람'의 뜻이 되고,
노래는 3단보다도 2단으로 나누어 이것을 읽어야 할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하나님께 땅 위에는 평화, 은혜의 사람 가운데'
그 어느 것이라 해도, 하늘에서의 울려 퍼짐은 모두 장중한 것일 뿐이었다.
즉 '지극히 높은 곳', '영광', '하나님', '땅', '평화', '인류', '은혜,' 이것이다.
이들 말의 뜻은 문전(문법 해설자) 또는 사서에 의해 해득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의 전체의 정신에서 이것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평화는 무엇인가?
사람 사이에 분쟁 없음을 일컬음일까?
아니, 크리스천의 사상으로서의 평화는 그런 경박한 것은 아니다.
도대체 우리가 참으로 사람과 분쟁치 않기에 이르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즉, 우리들이 하나님과 분쟁하지 않기에 이른 때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평화란, 단지 사람과 다투지 않을 뿐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대 만족 있음의 뜻을 가진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 우리들의 마음에 임하고, 그런 후에 평화는 오는 것이다.
바울의 말로서 언제나
'은혜와 평화'(charis kai eirene)라고 아울러 일컬음은 이 때문이다.
옳다.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마음에 대 만족 있고, 그리고 생기는 것이 참된 평화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평화라고 역 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평강이라 역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의 샬롬, 그리스어(헬라어)의 에이레네, 모두 평강이다.
마음이 건전한 상태에 있음을 일컬음이다.
평화는 어떻게 하여 오는가?
국제 연맹과 그 대(大) 해군에 의해서 오지 않는다.
대통령 윌슨(I권 304역주)의 노력에 의해 오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여 죄를 사함 받고, 우리들의 전심 건강 상태로 돌아와, 곧 평화는 임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 있고, 그 결과로서 땅에 구원이 임하는 때 즉 평화는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이어는 여기서 '평화'의 역어를 물리치고서,
'땅에는 구원이 있을 찌어다'로 역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바의 평화는 평강이다. 건전이다. 구원이다.
다음에 은혜란 무엇인가?
에우도키아(eudokia)라고 하여, 다만 사물 또는 영으로서 임함의 뜻은 아니다.
이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가장 좋은 주해는 마태복음 3장 17절 등의
(마태복음 17:5; 마가복음1:11; 누가복음3:22; 베드로후서1:17)
'이는 내 마음에 합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그 말이다.
저, '마음에 합한 이'라고 역 된 것은, '은혜'와 같은 자(字)를 동사로서 쓴 것이다.
이것을 영어로 하면, well disposed이다.
하나님께 '좋게 생각된다' 또는 '그 마음을 기울이신다'의 뜻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울이시는 이였다. 하나님께 좋게 생각되는 이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맞는) 이였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였다.
그리고 다만 그리스도 뿐은 아니다. 우리들도 또한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울이는 자일 수가 있다.
자식이 어버이(부모)에게 거역할 때, 어버이는 그 마음을 이에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역(배반)한 자식이 어버이께로 귀순하는 때, 어버이도 그 돌렸던 얼굴을 이에 향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께 좋게 생각되는 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울이시는 자로 될 수가 있다.
은혜의 사람이란,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울이시는 자이다.
그러므로 '땅에는 평강, 은혜의 사람 가운데 있을지어다.'라고 함으로서,전 사실을 노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에 태어나, 지극히 거룩한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그리고 동시에 땅에는 평강, 즉 구원이 임했다.
누구에게 인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울이신 자에게이다.
'땅에는 구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맞는) 자 중에 있을지어다'라고.
단순하다. 명백하다. 물론 크리스천은 자신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는 자는 아니다.
은혜는 그를 통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다.
하지만, 은혜는 먼저 그들에게 내리는 것이다.
구원은 먼저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베들레헴의 교외에 있어서 천사가 목양자에게 전한 노래는 이 좁은 의미에서였다.
어떻게 하여 전 세계에 평화가 임하는가?
먼저 크리스천에게 평화가 임하고, 그런 후이다.
어떻게 하여 사회 또는 가정에 평화가 임하는가?
먼저 우리 자신에게 평화가 임하고, 그런 후이다.
우리 자신의 마음에 평화 없이, 그저 평화 평화를 외친대도, 평화는 세상에 임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우리 마음에 충일(overflow)하는 대 만족, 대 평강 있을 때, 그런 후에 모든 사람과의 사이에 평화는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우리 마음에 평화는 임하는가?
자기 자신(배꼽 navel)만을 주시하여, 평화는 내 마음에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평화를 맺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기울여주시는 자로 될 때, 비로소 우리 심령에 대 만족이 생긴다.
어떻게 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맺을 것인가?
나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러 봄으로서 이다.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되지 못하면, 평화는 결코 세상에 도래하지 않는 것이다.
평화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 전쟁은 종식(end)했다고 하지만도 평화는 아직 세계에 없다.
전쟁 그치고, 아직 도덕상의 경쟁이 있다. 상업상의 경쟁이 있다. 전도상의 경쟁이 있다.
그리하여 평화는 아직 세계에 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울이시는 자를 사이에는 이미 커다란 평화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가 서로 손을 잡는 때, 진정한 평화, 평화 중의 대 평화가 실현하는 것이다.
그 때, 인종, 연령, 남녀, 직업, 직위, 교육 등의 차별은 모두 철폐(abolition)되어, 모두 서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이다.
실로 그 기쁨, 형언키 어려운 것이다.
그러한 평화는 정치가의 노력에 의해 오지 않는다.
베르사이유 궁정에 있어서의 평화회의에 의해 오지 않는다.
다만 기도의 자리에 있어서의 죄의 회개에 의해 온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맺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께 좋게 생각되는 자, 하나님의 마음을 기울여 주시는 자로 된 사람 사이에만, 새로운 평화는 실현하는 것이다.
평화는 오로지 크리스천 사이에만 있다.
그런데 이 평화를 맛보는 일 깊으면 깊은 만큼, 우리들은 전 인류의 평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평화를 얻은 자는, 전쟁을 미워함이란 마치
사갈(snakes and scorpions)같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참된 평화론자는 절대적 비전론자이다.
저 평시에는 평화를 부르짖고 전시(戰時)에는 전쟁을 부르짖는 것 같은 자는, 아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맛보지 못한 증거이다.
먼저 하나님이 마음을 기울여 주시는 자로 되어 자기의 마음에 대 만족을 획득할 것인가,
곧 이르는 곳마다, 새로운 평화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마지않는다.
먼저 우리들 자신의 마음에 임하는 평화는, 더욱 넘쳐 우리들 주위에 유출되지 않고서는 마지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평화를 각자의 마음에 획득하라.
그리고 이르는 곳마다 평화의 빛을 발하라.
그리스도 세상에 임하심으로써 평화는 땅에 임했다.
즉 그를 믿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 사이에 임했다.
그리고 이는 전 세계에 임해야 할 평화의 원천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하나님께 있을 찌어다.
땅에는 평화, 은혜의 사람 가운데 있을 찌어다'이다.
(12월 22일 동경신전 기독청년회에서, 등정무필기)
국제연맹에 의해 세계 평화가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대 미신이다.
논보다 증거이다. 국제연맹은 이룩되지 못한다. 가령 이룩된대도 평화는 오지 않는다.
호랑이나 이리 같은 자기중심의 인류가 아무리 방법을 강구 한대도, 사랑의 결과인 평화가 실현될 리가 없다.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을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해진 너희들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서 13:23일역)이다.
외교술에 의해 세계의 항구적 평화를 실현하려는 정치가의 단전 가련하게 볼지라이다.
국제 연맹이 실패와 실망으로 끝날 것은 무엇보다도 명백하다.
*내촌감삼의 (1919년 2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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