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거듭난 삶 2024. 12. 2.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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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예(初禮)

-첫 참예(the first visit of worship)-

 

 

누가복음 241-52: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개역개정 한글역)

 

 

유대인의 관례에 의하면, 그들은 매년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 절기()를 지켰다.

 

즉 유월절(163역주), 오순절(3396역주), 장막절(3296)이 이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대한 것은 유월절이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본래 경건한 사람이매, 언제나 이 관례를 실행했다.

소아(小兒) 예수는 이미 몇 번이나 부모를 따라 수도(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유대에 있어서 소아는 12세에 달할 때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가 12세 때, 절기()의 예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41일역)라고 있는

그 때가, 예수의 참된 초예(초참예)로 보아 좋으리라.

 

때는 양춘(spring) 4월의 계절 팔레스틴(1299역주)의 마을 마을 동네 동네에서 기십만의 사람들, 서로 손을 잡고, 떼 지어 낙역부절(絡繹不絶)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絡繹不絶 (낙역부절)의 의미: 인마(人馬)의 왕래가 계속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고 가는 것이 잦아 왕래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의미.

 

소아는 또 소아동지의 일단을 만들어(작반하여) 동행했다.

그들은 모두 소리를 맞추어, 이른바(소위) 수도참예(성반참석)의 노래를 노래하면서 나아갔던 것이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였는지는, 시편이 보여주는 바에 의해 일부분(일반)을 엿볼 수가 있다.

 

초예의 습관은 꼭 유대에만 있는 것 아니다. 우리들 사이에도 이 습관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의 도예(성도 참예) 같은 장엄한 것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타방(a foreign country)에 그 예를 볼 수는 없다.

 

그들은 7일간 예루살렘에 체재하면서 절기를 지키고, 그 후에 귀도에 올랐다.

 

예수의 부모는 그 아들이 혼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음을 알지 못하고, 아마도 소아(小兒)()중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하루 길을 귀향해 갔다.

 

그런데 예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자, 이를 찾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마침내 3일 만에 성전에서 그를 발견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에게 일러 말했다.

 

'아들아,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만드느냐. 네 아버지와 나는 걱정하면서, 너를 찾았다'.

 

하지만 예수는 이에 대답하여 말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십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49일역).

 

원의는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에 가깝다.

 

즉 그의 부모가 그의 부재를 걱정하고, 여러 곳 찾아 다녔다는데 대하여,

 

'걱정하면서 나를 찾아다녀요! 나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성전)외에 달리 있을 것 아닌데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놀란 것은 요셉과 마리아였다.

오늘까지 아주 종순 잘하여 부모의 명이면 따르던 아들이, 이때 처음으로 어쩐지 양친에게 저항하는 것 같은 어기를 했던 것이다.

 

'부모(양친)는 그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더라'(50일역)고 있다.

 

그들은 물론 예수의 이 말을 해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이들 모든 것을 마음에 두더라'(51일역)

 

지금은 그 의미 아직 불가해이다.

그러나 언젠가 알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을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불신하는 현대인, 특히 저 청년 학생은, 무엇인가 자기의 두뇌로써 해득할 수 없는 비의에 조우하는 때, 아까워하는 기색도 없이 이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 있는 사람의 태도는 그것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해득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잠시 그대로 심중에 보류하고서, 드디어 빛이 주어질 때를 기다린다.

이는, 특히 부인에게 많은 태도이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에 대하는 것은 언제나 그러한 것이었다.

예수는 그러한 대답은 했지만도, 조금도 아의를 고집하는 일없이, 온순하게 부모의 말씀대로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래 '지혜가 나이가 더해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더 사랑 받더라'(52일역)고 있다.

 

지혜란 영적인 지혜이다. 나이는 오히려 키(신장)로 역해야 할 말이다.

안으로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밖은 사람에게 사랑받아, 하나님 아들답게 성장을 했던 것이다.

 

이상은 사실 그대로 아무런 윤식(embelishment)도 않은 기사이다.

하지만 이에 비평안을 기울여 2, 3의 주장()을 하는 자가 없는 것 아니다.

 

그 일례는, 마리아 예수에게 말한

'네 아버지와 내가 걱정하여'라는 말을 잡아 가지고서 예수의 처녀 강탄을 부정하려하는 것이다.

 

이미 요셉을 예수의 아버지라고 언명한 이상, 그가 요셉의 실자(實子)였음은 분명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논자에 대하여 예수 자신의 반답의 말이 곧 변박을 하는 것이다.

 

예수는 대답하셨다. 이르기를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당신(어머니)은 요셉을 내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달리 있습니다'고 하여,

 

즉시에 어머니의 틀림(오류 mistake)을 바로잡은 것이다.

이는 필경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의 최초의 발표였다.

 

또 혹은 여기에 있어서의 예수의 반답의 말을, 어머니에 대한 힐책의 말로 보고, 뒤에 그가 전도를 하신 때, 어머니 및 형제가 그에게 이야기하려 찾아온 데 대하여,

 

'내 어머니는 누군가! 내 형제는 누군가! 무릇 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이는 내 형제, 내 자매, 내 어머니라.'고 한 것과 함께, 그리스도교에 효도 없음의 실증으로 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이 그릇된 것임은 성서 전체에서 보아 명백하다.

특히 십계명 같은 것은 가장 높은 의미에 있어서의 효도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어머니를 책한 것 아니다. 그 잘못을 바로 잡은 것이다.

 

예수는 부모에게 쓰임에 지극히 유순했다. 다만 나이를 더해감에 따라, 자기가 요셉, 마리아의 아들이 아님을 더욱 더 명료하게 의식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에 절로 인정에 잡혀 부모의 태도를 취한 때에,

예수는 언제나 조용히 그 잘못됨을 바로 잡아들였던 것이리라.

 

'나는 당신들의 아들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의 구주입니다'라고 가르치셨던 것이리라.

 

저 갈릴리의 가나에 있어서의 혼연 때에도,

 

'여인이여,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고 한 일 등도 그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언제나 이것을 마음에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마리아 등의 구원에 대해 관계있는, 일이었다.

 

실로 성 아우구스티누스(4248역주)가 말한 대로,

마리아의 구원은 그가 예수를 낳은 것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우리와 한가지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 의지한데 있는 것이다.

 

같은 일이 우리들의 가정에 있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부모보다 이상의 천직을 가지고서 부모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이 있는 것이다.

육체의 관계는 영혼의 관계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들의 참된 형제는 누구랴?

 

육체의 형제가 아니라 신앙의 형제들이다. 이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런 말로서 부모의 잘못(오류)을 바로 잡았다는 것은, 아마도 저 30년의 그 생애 중 종종 되풀이했던 것이리라.

 

이 경우에 있어서도, 그가 부모에게 저항하지 않았던 최상의 증거는 조금도 아의를 내세우는 일없이, 곧 부모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간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후 18년 동안, 부모에게 쓰임에 유순하게, 요셉의 사후는 스스로 그 업을 계승하여 공인의 생활을 계속했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 그를 찾고, 3일 후, 성전에서 그를 만난 때,

 

예수는, '교사 중에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니라'(46일역)고 있다.

 

'또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교사에 대한 생도의 태도이다.

 

예수는 결코 이때 심원한 대 문제를 제공하여 선생(doctor)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아니다.

참된 지식을 구하여 이것을 묻고 들었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의 자각은, 이때 조금 움트기 시작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 명백한 기사를 곡해하여, 예수의 어린 시절 이미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많은 교사를 가르친 것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

17세기 무렵부터의 회화에, 그러한 사상으로 그려진 것이 적지 않았다.

 

또 성서 이외의 어떤 그리스도전에도, 예수가 이때, 천문, 물리, 철학상의 대 문제를 내걸고,

아라비아, 그리스 등 제방에서의 학자에게 설명을 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을 누가복음의 기사 그대로 묘사한 것은 저 유명한 호프만의 그림이다.

여기서는 천재의 상상이 예수와 그 주의의 사람들을 능숙(교묘)하게 활약케 하고 있다.

 

예수는 그 의장이라든가 거동이라든가 순연한 소아이다.

다만 약간 그 빛나는(piercing) 안광에 있어서 보통인(상인)과 다름을 볼뿐이다.

 

그리고 예수의 정면에 앉은 이는 박학의 닥터(doctor 선생, 박사)이다.

그는 만 권의 글()을 독파하여 겨우 획득한 진리를, 지금 목전의 한 소아의 입에서 듣고서 아연(dumbfounded)한 모습이다.

그 곁에 선 것은 한 종교가이다.

그가 승려임은 그 입은 의복이 보여주는 바라 해도 그 머리의 골상(physique)은 분명히 그가 대속인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종교계의 대속물은 오로지 예수의 단순을 동정할 뿐이다. 그 나란히 있는 이는 부유한 귀족이다.

그도 또한 몹시 놀람(경해 great surprise)과 연민(pity)으로서 소아를 내려다보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들과 상대하여 다만, 한 사람, 참으로 예수를 해득한 사람이 있다.

그는 평신도로서 성실하게 진리를 사모하여 구하는 사람이다.

이들 수인을 예수의 주위에 세운 후, 화가는 어떤 한 사람을 더 써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즉 민중의 대표자이다.

그는 아주 무정견(lack of fixed opinion) 한 듯한 모습(features)으로써

예수의 배후에서 엿보고 있다. 그 태도는 어디까지나 불성실(unsteadness)하다.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여 '호산나'라고 하면, 그는 또한 '호산나'라고 외치고,

'이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면, 그도 소리에 맞추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다.

 

실로 예수의 전생(全生)에 걸쳐서 그에게 접촉한 모든 사람의 전형이 여기에 나열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람들 사이에 앉아 '또한 듣고 물으신' 예수의 모습이 가장 있는 그대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젖내(유취 smelling of milk) 나는 12세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임의 자각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기이하다면, 기이하다 않을 수 없다.

실로 엄동 한창일 때 어느 날 한기 갑자기 가시고 봄빛 천지에 꽉 참(편만)을 생각하게 하는 일 있듯, 사람은 12, 3세의 유년 때, 어쩌면 전 생애를 예표 할 만한 사실을 나타내는 일 결코 드물지 않은 것이다.

 

천재의 생애, 혹은 우리나라의 죠우닝(상인-지식 높은 불제자)의 전기 등에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신랑 죠우닝(5414 신랑 역주) 이 저 유명한 '내일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바람둥이 여자'의 가시를 한 것은 그가 9세 때였다.

 

호우넹 죠우닝(7167역주)이 출가(불문입도)하려고 스승을 방문한 것도 또한 그 무렵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악가 베토벤(1250역주)4세에 피아노를 치고(탄주하고), 11세에 이미 작곡하고, 12세 때는 비엔나(Wien)에서의 합주의 지휘자였다고 한다.

이때는 대개 처음으로 천재를 나타내는 시기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이때 초예(초참예)를 시도하고, 부패했다고는 하나 종교의 중심지로 들어가 성전 중 신학자의 일단과 만난 때, 특히 하나님의 아들임의 자각이 솟아온 것은 실로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이는 오히려 자연적인, 믿을 만한, 받아야할 이야기이다.

그 자발적인데 도리어 계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不信)의 교사들은 이것을 기라고 하는데 지나지 않았지만, 보는 눈은 알아 보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실로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의 초예의 일은, 그 기적적 출생에 이어서의 하나님의 아들임의 증거이었다.

단 그는 신자의 자각 있었다 해도 아들로서의 부모 공경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래 18년 동안, 나사렛 한촌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를 섬기며 잘 집안을 돌보고, 그리하여 나이 30세에 이르렀다. 효양의 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 해도 몸으로서 실행했던 것이다.(17일 등정무필기)

 

*내촌감삼의 (19172'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