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대로 포기하고 방콕행…“저개발국 사법지원 관심 기울일때”
“이제 우리도 시선을 밖으로 돌려 우리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국가들을 법률적 차원에서 도와줄 때가 됐습니다”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아시아ㆍ태평양지부에서 ’국제 검찰ㆍ형사사법 수석조정관’으로 활동하는 이준명 부장검사(사법연수원 20기)는 UNODC에서 ’트레일블레이저’(trailblazer.개척자)로 통한다.
그는 아태지역내 초국가적 사법협력체계 구축을 목표로 하는 ’아시아저스트’(AsiaJust)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설계했고 진행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 부장검사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둔 것은 대검 마약과장으로 일하던 2006~2008년 아세안(ASEAN)과 함께 마약퇴치를 위한 국제협력사업을 하면서 각 나라의 사법기관간 공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부터.
예를 들어 범인 인도와 제3국에 투자된 범죄수익의 환수 등은 수사기관의 영역을 벗어나는 문제라 검찰과 법원 등 사법기관간의 협력이 필수적인데 공조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범죄 해결에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가 산고 끝에 내놓은 해답이 바로 아시아저스트 프로젝트다.
아태지역내 각 국가의 사법기관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자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취지인데 이 부장검사는 이를 ’사법 고속도로’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작년 초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고자 방콕행을 최종 결심하기까지는 번민과 갈등도 적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주변에서는 대검 마약과장과 조직범죄과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앞으로도 좋은 보직을 맡을 기회가 많을 텐데 왜 굳이 낯선 길을 가려 하느냐고 말렸다고 한다. 낯선 환경에서 어려운 생활을 감내해야 할 가족에 대한 걱정도 컸다.
그러나 “당신 나라에서 검사로서 하는 일의 반만 이곳에서 할 수 있다면 수백만명의 목숨도 살릴 수 있다. 함께 일해 보자”는 UNODC 아태지부 회원국 관계자들의 순박한 눈빛을 끝내 저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수많은 돌연변이가 인류의 진화를 앞당겼다는 진리를 횃불 삼아 아무도 가지 않은 밀림을 개척하는 트레일블레이저가 되겠다”는 비장한 말과 함께 출사표를 던졌고, 결국 이러한 그의 신념을 가족들도 이해했다.
국제사법공조시스템 구축에 대한 의지와 노력,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겠다’는 타고난 승부근성은 그를 주변에서 인정하는 ’일벌레’로 만들었다.
이런 모습을 알아본 정병하 한국형사정책연구원(KIC) 파견검사(사법연수원 18기)는 KIC를 설득해 50만달러의 사업자금을 선뜻 내놨다.
이 부장검사는 국제사회에서 수혜자가 아닌 공여자로서 한국의 역할이 증대되는 현 시점에서 법률체계가 미비한 저개발국에 대한 사법적 지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처럼 사법시스템이 선진화돼 있는 나라도 드물다”며 “우리가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고 이제 도움을 줄 위치에 있는 만큼 개발도상국에 대한 사법적 차원의 지원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심정으로 지난 1년을 달려온 이 부장검사는 지금까지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또 다른 도전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는 31일 “아시아저스트는 각국이 가진 사법시스템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인 만큼 언제 완료될지 알 수 없지만 끝내 성공하리라 믿는다”며 “프로젝트가 잘 수행돼 새로운 기구가 만들어지는 것이 현재 가진 작은 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