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박선이의 TALK TABLE1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유가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건 자유가 그저 말로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고 외친 한비야는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우리에게 스스로 택한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익숙해진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자유와 삶을 찾아나서는 그는 우리를 향해 ‘깨어나라’고 도전을 재촉한다.
국민 언니. 한비야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뉴욕에서 보스턴행 버스를 탄 지 꼭 4시간. 우리나라 시외버스 터미널과 흡사한 사우스 스테이션으로 버스가 미끄러져 들어간다. 지난해 여름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을 사직한 한비야는 국제관계학으로 이름난 터프츠 대학 플레처스쿨로 공부하러 갔다. 플레처스쿨은 보스턴 북쪽 메드포드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지하철을 타고 한동안 달려 한적한 역에 내린 다음 다시 메드포드행 버스를 타고 중심가에 내렸다. 거리엔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지나가는 택시도 없다. 망연히 주변을 돌아보다 그나마 낯익은 ‘던킨도너츠’가게로 들어갔다. 손님 하나 없는 곳에서 볼이 빨간 여학생 혼자 아르바이트 중이다. 그에게 길을 물었더니 택시를 불러준다. 쓰나미가 쓸어가고 지진이 뒤흔들어버린 온 세계 재난 현장을 동분서주하던 전직 긴급구호팀장이 이런 조용한 동네에서 뭘 하고 있을까. 택시 미터기가 8달러를 찍는 순간 차가 멈춘다. 순간, 조그만 여자가 차 옆으로 뛰어든다. 배낭을 메고 목도리로 무장했다. 그가 말한 대로, ‘비야 학생’이다.
“진짜 왔네, 진짜. 와 반갑다, 반갑다!! 여섯시부터 기다렸는데!”
애초에 약속이 저녁 일곱 시였다. 그런데 스터디그룹이 마침 일찍 끝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우스 스테이션부터 택시를 탔으면 한 시간은 일찍 도착했을 거였다. 모르는 동네는 그렇게 사람을 위축시킨다. 그런데 이 씩씩한 여자는 지난가을 자리 잡은 그곳을 마치 제 고향처럼 자랑한다.
“학교 구경부터 해요.”
그의 손에 이끌려 플레처스쿨로 들어갔다. 로비에는 학생들이 몇몇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그가 “여기가 내 자리”라며 가리킨 곳은 칠판 바로 앞 중간 자리였다. 강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 자리에는 정말로 ‘Biya’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국제구호업무 중 식량 분야를 주제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 짐바브웨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 논문은 이제 초안을 마쳤고 5월 20일 마감을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아침 8시면 학교에 와서 밤 1시, 2시까지 공부에만 매달리는 지극히 단순하고 집중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요즘을 그는 “내 인생의 맷집을 키우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보스턴에서 비야를 만나다
이 인터뷰는 비인가(unauthorized) 인터뷰다. 그는 2년 예정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밀도를 강화해서 1년 만에 마치기로 일정을 바꿨다.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매체 인터뷰는 절대 사절 중. 이번 만남도 그냥 얼굴이나 보자는 거였고, 만남도 논문 초안을 낸 다음 날로 정했다. 딱 하루 저녁, 쥐어짜낸 휴가였던 셈이다. 그러나 어둠에 잠긴 학교 뜰을 거닐며 그가 토해낸 말들은 그와 함께 한 세상을 건너가고 있는 나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아포리즘으로 가득했다. 나는 수첩을 꺼내들었다. 이를테면 나는 그와의 사적인 시간을 이 자리에 옮기는 것이다.
“나는 정말 나에게 감사하는 게, 내가 유목민이라는 거예요. 나는 너무너무 뜨겁게 사랑을 주고 마음을 주다가도, ‘떠날 때다’ 생각하면 미련 없이 짐 싸고 싹 돌아서요. 짐 싸들고 떠나야 다른 삶이 또 있어요.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면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기도 어려워요.”
어둠이 무슨 방해가 되랴. 그 스스로 ‘비야스 스팟’(Biya’s spot) 이라고 이름 붙인 캠퍼스 곳곳으로 짧은 순례를 나선다. 교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강의실 자리, 창 너머로 석양이 깔리는 도서관 3층 좌석, 아침과 낮, 한밤중을 가리지 않고 그가 종종 발을 올려놓고 스트레칭을 하는 복도의 철봉 난간, 대학교회 옆의 나무 벤치…. 그 중간 중간 그의 목소리가 밤 공기를 가른다.
“우리 사는 게 기차라고 생각해봐요. 이 기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다른 기차를 못 타죠. 물론 계속 타고 가면 더 편하긴 하지. 하지만, 지루하잖아요? 나는 지금 인생의 환승역에 와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어떤 차를 탈지 나도 무지 궁금해요. 분명히 내 몫의 차표가 있을 텐데, 어디로 가는 차일지, 뭐 하러 가는 차일지, 그걸 기대하는 것도 제 삶을 기쁘게 하는 요소죠.”
그는 환승역에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황홀할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선택해야 할 다음 기차에 대한 부담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부담감을 갖고 있는 것은 자신의 책을 사고 읽어준 독자들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이다.
“저는 ‘독자 유학생’이에요. 독자들이 유학자금 대주신 거, 그게 정말 자랑스럽고 기뻐요.” 구호 현장과 정책 사이의 거리, 가슴 터질 듯 비참한 현장에서 정책의 차가움에 답답하고 막막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던 그는 지금 그 거리를 좁히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한편으로는 벌써 ‘플레처스쿨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8월 말 귀국하면 9월부터 바로 백두대간을 완주할 거예요. 유학으로 정신을 튼튼하게 했다면 몸을 만들어야 할 필요도 있거든요.” 가을 석 달, 내년 봄 석 달, 모두 6개월 예정이다. 연습은? 학교 언덕에서 전지훈련에 돌입했다.
“내가 매일 북한산을 바라보고 살았잖아요? 근데 여긴 사방이 툭 트인 평지예요. 너무나 등산이 하고 싶어서 어느 날 등산화 신고 배낭 메고 여기 대학교회 앞 언덕을 오르내렸어요. 사람들이 뭐 하는 거냐고 해서 ‘나 지금 등산 중’이라고 했죠.”
학업에 매진할수록 구호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그는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설렘을 유지하고 열정을 쏟아낸다. 스스로 ‘조증(燥症)’이라고 웃기도 했고, 누군가 ‘소녀기질’이라고 한 대로, 쉬지 않고 샘솟는 에너지다. 깜깜한 어둠 속에 캠퍼스 곳곳을 돌면서 그는 자신이 터프츠대학 설립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여기 교수님들이 내가 찾던 바로 그런 분들이세요. 1년의 절반은 현장에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강의하면서 연구보고서를 쓰는데, 정책 담당자와 입안자들이 당장 ‘만세!’ 하고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에요. 처음엔 엄청 똑똑한 사람들만 모여서 경쟁이 정말 심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저처럼 못하는 사람을 끌어올려 함께 가는 게 정말 대단해요.”
한비야는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고단함도 이야기했다. 물론, 행복이 전제된 고단함이다. 시내의 작은 이탈리안 식당으로 옮겨 앉아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이 남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좌절하고 실망하잖아요? 저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요즘 매일 실감해요.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야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지난 학기에 국제인권법 과목이 정말 힘들었어요. 법의 개념도 용어도 다 낯설고 힘들었죠. 시험 과제가 사례를 들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까지 내놓는 것이어서 못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죽어라 매달리니까 결국 해내더라구요. 8시간 동안 오픈 북으로 시험 봤는데 A4지로 10장을 써서 A- 받았어요. 물론 A+, A0 보다는 못하죠. 하지만, 여기 올 때까진 전혀 몰랐던 걸 하게 된 거니까, 잘한 거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만학도는 젊은 학생보다 학교생활에 훨씬 더 흥미를 갖고, 훨씬 잘 빠져든다고 했다. 한비야가 그렇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특별히 겪는 새로운 일들이 많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학문으로 정리하는 과정도 그렇고, ‘조카’ 같은 까마득한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특별한 체험이며, 집에 갈 때 경찰 호위를 받는 것도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매일 밤 1시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갈 때면 학교 경찰이 데려다줘요. 처음엔 그날만 특별히 그러는 줄 알았는데, 매일 해주더라구요.”
조그만 동양 여자가 밤마다 경찰차를 타고 나타나니 동네에서도 희한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저 여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하더니, 좀 지나서는 애인이 경찰이라고 소문났대요. 옆집 아줌마가 정말이냐고 물어서 웃고 말았지요.”
이처럼 생각지도 않았던 스캔들(?)까지 겪어가며 그가 몰두하고 있는 숙제는, 지난 8년간 재난 구호 현장에서 겪은 일을 법적, 정책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일이다.
“어느 현장에서든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여성과 어린이 인권입니다. 여성은 재난과 전쟁의 다중 피해자예요. 여성들의 전쟁 피해는 전선에서가 아니라 일상으로까지 확대되지요.”
그는 강간, 강제 임신이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전쟁 전략으로 수행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적국 남성들을 모욕하기 위한 것이죠. 전쟁 비즈니스와 여성, 어린이에 대한 무참한 폭력이 동반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수단, 콩고, 짐바브웨 모두 마찬가지예요.”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고,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애정이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지난 1월 발생한 아이티 지진 참사로 마음이 흔들렸다. 월드비전에서 ‘일단 명단에 올리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사안이 사안이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이 문제를 두고 학교와 의논했다.
“긴급구호 팀은 조직이 짜여 있거든요. 식량-물-쉼터-의료가 4대 생명구호 섹션이에요. 그런데 학교에서 학기 중에는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하지만 단 하나 예외가 있다더군요. 만약 북한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내가 뛰어들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가 다시 환승역에 서 있는 이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조그만 식당 벽에도 흔히 걸려 있는, 소망과 기대, 믿음이 버무려진 이 귀절이 한비야의 삶을 설명한다. 서른다섯에 불현듯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날 때 그는 사회적으로는 ‘완전 무명’인 직장 여성이었다. 북한산 등산길에서 친구들에게 불쑥 밝힌 대로 그는 남미로,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오지를 걸어서 여행했다.
그의 여행기는 마치 먼 북소리처럼 여성지에 매달 꼬박 꼬박 연재되었고, 첫 여행을 떠나는 그와 송별 점심을 했던 나는 여행기가 마치 나에게 배달되는 엽서라도 되는 양 반가웠다. 5년간의 세계 일주를 마친 그는 <바람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4권의 여행기를 냈다. 그 여행을 통해 한비야는 홍보전문가에서 ‘오지 여행가’로 변신했지만, 더 큰 변화는 그 뒤에 왔다. 오지 여행에서 목격한 극도의 빈곤과 아이들의 비참한 삶을 구제할 수 있는 길로 뛰어든 것이다. 2001년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에 긴급구호팀장으로 들어간 그는 도전과 나눔을 키워드로 대한민국 청년들의 새로운 리더십 모델이 되었다. 그는 배고픔의 유전자를 지운, 이 땅의 첫 글로벌 세대가 첫 번째로 손꼽는 역할 모델이다.
구호 현장 체험을 담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초베스트셀러가 되던 시기, 한국은 세계 최초로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변신했다. 세계 경제 10위권에 오른 한국의 새로운 세대는 한비야가 제시한 ‘나눔의 리더십’에 열광했다. 길에서 마주친 중학생들이 그에게 긴급 구호에 쓰라며 5천원, 1만원 용돈을 털어주는 일도 생겼다.
지난해 그는 대학생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 네티즌이 꼽은 만나고 싶은 사람 1위로 손꼽혔고, 가장 바람직한 여성 리더십의 전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리더십의 핵심은 ‘선한 영향력’이다. 키플링은 인생의 비밀이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비야와 세상도 그렇게 인생의 비밀을 공유했다.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삶의 모델을 제시한 그에게 세상은 감사와 기쁨으로 답했다. 사법고시에 붙거나 기업 중역이 되어야 성공한 삶이라고 여기던 부모 세대들의 가치관을 흔들고, 온 세계를 무대로 한 글로벌 시대 우리 아이들에게 나눔과 베풂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을 활짝 열어줬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그 일을 왜 그만두었냐고 물었다. 언제나 활짝 웃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내쏘는 그에게도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을까.
“세상에 다 있는 고통이 왜 나에게만 없기를 바라겠어요?”
쓰나미 현장의 시체 썩는 냄새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고, 뇌혈관 문제로 잠시 쉬기도 했다. 멀쩡한 사람이 왜 사서 고생을 할까, 지금까지도 한비야를 두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는 고통이 두렵지는 않아요. 일부러 고통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지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눈치를 보거나 쩔쩔 맬 필요는 없어요. 내 몫의 고통이 있는 거죠, 기쁨이 있는 것처럼.”
그는 물리적인 고통의 무게보다, 삶과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 월드비전을 그만둘 무렵 그 고민이 아주 많았다.
“9년차가 되니까 일이 쉬워졌어요. 매뉴얼화된 거죠. 마음이 덜 뛰어요. 하느님께 덜 의지하고, 마치 내가 다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전에는 ‘이게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였는데 이젠 어디서 큰 재난이 일어나도 기도를 덜 하게 되는 거예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하느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도와주세요’ 눈물로 기도했는데, 지금은 그저 상식적으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 나 자신을 보고 ‘갈 때가 되었다!’ 생각했어요. 그게 내 마음의 고통이고 아픔이었어요.”
실제로 그는 언제든 일이 쉬워지면 한순간 그만두고 다음 일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밌게 살다 6년 만에 대학에 갈 때도 그랬고, 외국계 홍보회사 일이 손에 익어갈 무렵에 일을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 몸에 붙을 무렵 구호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국제 구호 업무의 ‘간판스타’가 되었을 때 분연히 그곳을 떠났다.
“인생이 단맛만 있다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단맛 말고도 쓰고 짜고 시고 떫고 4가지가 더 있어요. 인생의 오미를 다 맛봐야 진정한 단맛을 알 것 같아요. 아주 쓴맛을 보았다면 덜 쓴맛이 단맛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죠. 쓴맛에서 단맛을 찾을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성공한 삶이란 그리 거창한 게 아닐 수도
지난해 8월 펴낸 <그건, 사랑이었네>는 그가 지금까지 낸 책들과는 조금 달랐다. 여행과 긴급 구호 체험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주로 쓴 이 책에서 그는 사랑의 힘을 여러 번 언급했다. 이십여 년 만에 공식석상에서 첫사랑을 다시 만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결혼 안 한’ 여성으로서의 어려움을 물었다.
“하하하, 어떤 괴로움이 있냐면, 내가 부부들이랑 만나면 집에 가서 꼭 싸운대요. 저는 누구를 만나면 무지 가깝게 생각이 되거든요, 그래서 ‘내가 너랑 되게 친하다’ 그런 힌트를 주는 것 같아요. 만나는 순간은 정말 ‘나는 완전히 네 거야’(I’m totally yours) 그런 거죠. 그게 유목민 기질인 것 같아요. 무슨 남성 편력이 대단해서는 아니고. 사실 여성들에게 더 그러는데….”
그는 보스턴에서 만난 한국 학생들 이야기를 꺼냈다. 하버드 대학과 MIT가 있는 이 도시는 한국 엄마들에겐 ‘꿈의 교육 도시’. 유난히 조기 유학생, 대학생들이 많다. 한비야는 일반적인 성공 모델과는 다른 사람이어서, 그들에게 어떤 고민을 안겨주는 모양이다. 한비야를 찾아온 학생들이 ‘부모님은 의사가 되라, 변호사가 되라’ 그러는데, 정작 본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찾아오는 것이다. 한비야처럼 세계의 오지에 가서 어려운 삶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물음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한 일일 테다.
“네가 있는 곳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지, 혹은 네가 입은 옷에 어울리는 곳에 있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하죠. 모피 코트를 입었는데 하와이에 있다면 얼마나 거추장스럽겠어요? 하지만 알래스카에 있다면 그처럼 꼭 필요할 옷도 없을 거라고요.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부딪혀 보라고 말합니다.”
살아가는 데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다. 유목민이냐 아니냐는 어쩌면 방법론일 뿐, 진짜 삶의 진실을 찾는 것은 스스로 살아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데 어떤 부모님들은 자기 아이들이 내 책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하면 ‘우리 애한테 바람 드는 거 아닌가’ 걱정한대요. 어디 오지 여행을 떠난다거나, 재난 현장으로 떠난다고 할까봐. 하하하하.”
그는 이 부분에서 진지하고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결혼을 안 했고 아이도 안 낳아봐서 인생의 숙제를 아직 다 하지 않은 사람인지 몰라요. 하지만 여기서 아이들을 만나보면 생각이 탄탄해요. 부모가 믿어주고 맡겨주면 더 성장할 거예요. 우리들 스무 살 때를 생각해보세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잖아요? 이제 우리 국력이 G20(선진국 20)에 든다는데, 우리 아이들은 더 글로벌하게 성장하고 큰일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실패 경험이 없는 사람이 더 문제라고 걱정했다.
“모든 것을 다 얻은 분들이 마지막 하나를 놓치면 더 크게 좌절하죠. 한국 최고 기업의 임원이 자살했다는 뉴스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동안 이룬 것이 얼마나 큰데, 실패만 본 걸까요? 대학 떨어지고 재수하는 게 무슨 큰 창피라고 엄마들이나 아이들이 죄인이라는 얼굴로 다닙니까? 재수도 하고 삼수도 하고, 실패와 좌절에 맞설 수 있는 맷집을 키워야 해요.”
그는 자신도 대학 안 가고 일하면서 세상을 떠돌며 지낸 6년 동안 얼마나 맷집을 키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많은 분들이 저를 편하게 생각하는 게, 제가 대학 안 가고 이런 일 저런 일 했지, 그다지 유명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지, 유학도 하버드대학, 이런 데 안 갔지, 집도 강북, 북한산 아래 불광동 살지 그래서 그러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지도 밖으로 행군할 예정
한비야는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삶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가 전쟁 지역이나 재난 지역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공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많다. 물론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삶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는 ‘안티 한비야’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릎팍도사>에 나간 뒤에 그런 말이 나온 거 알아요. 두 가지가 문제인 거 같은데, 비야가 본명이 아니라는 것하고, 크리스천이라는 것이죠. 근데 사실 그건 제가 이미 책에서 밝힌 거예요. 욕하는 분들은 사실 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이 많은 거 같아요.
본명이 한인순이라고 책에서 밝혔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썼죠. 또 어떤 분들은 내가 유학 온 것도 ‘보스턴 유학기’ 써서 책 팔려고 온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나는 죽을 때까지 책을 쓸 거예요. 여기 왔다고 해서 쓰는 게 아니고, 어차피 쓸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걸 감추고 있다고도 하더라고요. 하하하하! 이혼이 무슨 죄라고 안 밝혀요? 내가 제일 가고 싶은 여행이 신혼여행인데, 그걸 아직도 못 간 게 아까워 죽겠는데.”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식당을 나와 보스턴의 구도심을 걷는다. 그의 목소리가 겨울 밤 공기를 쨍 하고 깨뜨린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물었다. “자유. 무엇을 할 것인지, 언제 멈출 것인지, 새롭게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 저도 가족을 부양해봤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이유로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걸 봐요. 사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는 ‘지도 밖으로’ 나가자고 외친 것이다. 그의 베스트셀러 제목이기도 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제가 한 말은 아니고요,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월드비전을 창립한 밥 피얼스 목사님이 ‘Keep marching off the map’이라고 말씀하신 데서 나옵니다. 월드비전 직원 교육 때 쓰는 교재에 실린 그 말이 너무 좋아서 허락을 받고 썼습니다.”
그는 처음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고 한다.
“정말 이 길밖에 없는 걸까? 정말 이 길이 맞는 길일까? 언제나 그렇게 묻곤 하죠. 나는 이미 정해진 길보다, 모르는 길을 가보고 거기서 베스트를 얻고 싶어요. 물론 잘 아는 길로 갔으면 더 큰 것을 얻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에게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말씀은 마치 계시 같았어요.”
중국 작가 루쉰은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며 “희망이란 그렇게 해서 생긴 길 같은 것”이라고 했다. 길을 만드는 것은 곧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한비야는 그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길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증명했다. 그런 욕심으로 그는 지금 맷집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더 성장하고 싶어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은 많은데, 저는 서른을 넘기고서야 풀기 시작했잖아요? 예쁘게 포장해주신 것들을 내가 풀어보기 바라실 텐데 아직도 안 풀어본 선물 보따리가 더 많아요. 그건 선물 주신 분께 예의가 아닌 거 같아요.”
그는 나에게 ‘김치초콜릿’을 사오라고 했다. 미국 친구들이 김치랑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데 김치와 초콜릿의 퓨전을 도저히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면세점의 초콜릿 코너에 갔더니, 막걸리초콜릿, 김초콜릿, 고구마초콜릿, 백년초초콜릿, 심지어 고추초콜릿까지 있었다. 초콜릿의 진한 맛이 먼저 지나가고, 김치의 맵싸하면서도 발효된 맛, 김의 청정한 향이 잔향으로 남았다. 김치와 초콜릿을 섞는 도발을 서슴지 않는 것이 지금 한국의 역동성이다. 한비야는 지금 일상에서 그런 도전과 도발을 실현하고 있다.
/ 여성조선
글·사진 박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