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일교포사회의 고민

거듭난 삶 2010. 7. 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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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적에 북한 대표, 정대세 삶은 역사가 낳은 모순”

2010.07.08

재일 축구선수 이야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선수』 펴낸 교포3세 신무광씨



지난달 16일 남아공 월드컵 G조 예선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 북한 국가가 울리자 정대세(26) 선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고의 팀을 상대하는 것이 감동스러웠다”는 본인의 설명과는 별개로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로 눈물을 읽었다.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북한 대표로 출전한 재일교포 정대세. 남한·북한·일본 사이에 선 경계인의 눈물이다.

최근 그 눈물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최근 번역됐다. 재일교포 3세 스포츠라이터인 신무광(39)씨가 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선수(원제:조국, 모국, 그리고 풋볼)다. 3월 일본에서 출간돼 아사히 신문 등에 소개되며 호평을 받은 이 책은 J-리그 선수이면서 각각 남북한, 일본의 국가대표로 뛰는 ‘자이니치(재일)’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정대세를 포함, 북한 대표이면서 K-리그에서 뛴 안영학(31), ‘조선’ 국적을 갖고 북한 대표로 뛰었던 량용기(28)·리한재(28), 한국 국적으로 K-리그 선수로 활동했던 박강조(30)·정용대(31), 귀화해 일본 국가대표가 된 이충성(25) 선수 등이다.

지난달 30일 전화로 인터뷰한 신씨의 한국어는 유창했다. 초·중·고교를 조선학교(재일 교포들이 자녀의 민족 교육을 위해 설립한 학교.)에서 마쳤기 때문이다.

“대학부터 일본 학교를 다녔어요. 일본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친구도 생기고 공감할 부분이 많더라고요. 근데 취직을 하려니까 어려워요. 50개쯤 지원했는데 다 떨어지고 면접에선 ‘한국이나 북한에 돌아가는 거 아니냐’는 질문도 받았고요.”

“인터뷰한 선수들 얘기가 내 얘기 같았다”고 하는 건 이런 이유다. 그 역시 대부분의 선수처럼 조선학교를 나왔고, 한국 국적을 갖기 전엔 ‘조선’ 국적자였다. 일본은 패망 후 재일교포의 국적을 ‘조선’으로 처리했다.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이미 사라진 역사 속의 나라 조선의 국적을 붙인 것이다. 1963년 한·일 수교 이후 많은 재일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렇지 않은 재일인은 모두 ‘조선’ 사람인데, 이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인 셈이다. 정대세 선수의 경우 어머니는 ‘조선’이지만 아버지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갖게 된 경우다. 그런 정 선수 역시 초·중·고교·대학까지 조선학교를 나왔다. 책 속의 선수 모두 조선학교 출신이다. 일본 내에 조총련계 조선학교는 80여 개, 한국과 가까운 민단이 운영하는 한국 학교는 네 곳에 불과하다.

“보통은 고교까지 조선학교에서 마치는데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고 일본 이름도 안 써요. 흔들림 없이 사니까 아이들이 민족심도 강하죠. 그런데 학교가 조총련계니까 북한에 대한 것도 많이 가르치고…. 자연스럽게 조국은 북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죠. 저도 그랬어요.”

2005년 일본에선 북한과 일본의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전이 열렸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국 관계가 최악일 때다. 교포 사회도 흔들렸다. 이 경기에서 안영학 선수는 북한 대표로 출전했다. ‘대체 난 어느 나라 사람인가’ 혼란스러워하던 교포들이 안 선수를 보면서 힘을 얻고 있었다.

“기획서를 들고 출판사를 다녔는데, 반응이 없어요. 2008년에야 한 곳서 관심을 가졌고, 마침 정대세가 등장하면서 탄력 받았죠.”

책에 첫 번째로 나오는 선수가 정대세다.
“한국 국적이면서 북한 대표이고…대세의 삶 자체가 역사로 인한 모순이잖아요”
신씨의 말처럼 정 선수의 북한 국가대표 발탁은 이례적이다. 사실 그가 대학교 2학년일 때도 북한 대표 선발 기회가 찾아왔지만 무산됐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해당국 국적을 가져야한다’고 자격을 명시한 FIFA가 여권으로 국적 증명을 한다는 데서 방법을 찾은 것이다. 정 선수는 한국 여권을 발급받은 적이 없었고, 재일조선인 축구협회는 FIFA에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설명했다. 북한도 여권 발급을 결정했다.

“대세는 자기 성격도 ‘이중성격’이라고 해요. 경기장이나 인터뷰에선 지기 싫고 눈에 띄는 거 좋아하면서 그 순간만 지나면 후회한대요. ‘콧대가 높았구나, 이기적이었구나’ 하면서요. 파워풀한 플레이를 하면서 내면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의외의 이미지를 가졌죠.”

안영학 선수는 월드컵 개막 전날 남아공에서 신씨에게 전화를 했다. “유럽 전지훈련 땐 문자를 보내더니 이번엔 꼭 전화를 하고 싶었대요. 마음이 뛴대요. 결과를 떠나 보여 줘야 할 것이 있다면서요. 사력을 다해 뛰겠다고 했어요.”

북한은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경기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포르투갈전은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고 코트디부아르전은 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아요. 인상적인 플레이를 해 북한의 이미지를 바꿔 준 것 같은데…. 북한처럼 열심히 뛰는 건 어떤 측면에서 순진하다고 볼 수 있죠. 정정당당하게 밀어붙이는 용감한 경기였다는 사람도 있어요.”

신씨 역시 북한 선수를 직접 취재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안영학 선수로부터 종종 함께 훈련하는 신세대 북한 선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해외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야 있디. 기러나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결정할 수는 없디 않갔어”라는 고백, 각국 리그의 축구 수준이나 연봉 얘기를 나눈다는 얘기가 책에도 등장한다. 그는 딱 한 번 북한 선수를 만나 대화한 적이 있는데 북한 출신 최초로 2007년 유럽에 진출한 홍영조(현재는 러시아 FK로스토프 소속) 선수다.

“2005년 3월 대만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 예선전인데, 홍 선수가 다쳐서 관중석에서 팀 경기를 보고 있었어요. ‘우리 학교(조선학교) 나온 재일교포’라고 하니까 같이 축구를 보재요. 90분 내내 북한 선수에 대한 얘기, 축구 배운 얘기를 잘 해 주더라고요. 세계 축구 흐름이나 정보에 어두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좋아하는 선수가 누구냐니까 브라질의 데니우손이래요. 유명하지만 호날두나 지단 정도는 아니거든요. 가끔 북한에서 해외 축구를 중계해 준다고 하고,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 자료도 있다 하고요.”

홍영조 선수는 유럽 진출 후 멋도 부리고 세련돼져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고, 정대세 선수의 닌텐도도 갖고 논단다.

정대세 선수는 책을 읽고 신씨에게 원고를 쓸 수 있을 만큼 긴 e-메일을 보내왔다.
“다들 각오를 갖고 뛰는데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되겠더라고 해요. 형인 이세 얘기를 읽고는 그만큼 고생한 거 몰랐다고 펑펑 울었다 하고요. 이세가 한국 실업 리그에서 힘들었던 얘기가 책에 있거든요.”

신씨와의 인터뷰 직후엔 정 선수가 독일 분데스리가 2부리그에 소속된 VfL 보훔으로 이적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는 책의 마지막에 이충성 선수에 대해 썼다. 그는 일본 국가대표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했다. 일본 대표가 되겠다고 귀화한 첫 재일인이어서 교포 사회의 충격은 컸다. 하지만 그도 ‘리(李)’라는 한국식 성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책에 포함해야 하는지 망설였다는 신씨가 결국 이 선수를 만난 이유다.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얘기예요. 저도 아들이 있지만 4세, 5세들이 자라고 있잖아요. 이 아이들이 일본 사회와 교포 사회를 함께 생각하면서도 뿌리를 잊지 않고 조선 반도에 대한 애착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가운데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뜻입니다.”

홍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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