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깊은 데서 주를 기다리나니
시 130:1-8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8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시냇물에는 얕은 곳이 있고 깊은 곳이 있어서 그 깊이가 일정하지 않고, 인간의 생도 삶의 질에 있어서 그 깊이가 모두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신앙의 정도에 따라 얕은 신앙과, 깊은 신앙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기관에서 339명의 성도를 대상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설문조사한 통계입니다.
독실한 편이다 11.2%,
깊은 편이다 39.2%,
보통이다 43.5%,
깊지않다 4.9%
전혀깊지 않다 1.2%,
(결과적으로 깊은 신앙 50.4%, 얕은 신앙 49.6%)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 도다(1,5절)”.
‘깊은데서’라는 히브리어 ‘미마아마킴’을 직역하면 ‘깊음으로부터’이나 문맥상으로는 ‘심한 고통’’극심한 위기’를 뜻하는 것으로 ‘깊은 수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편기자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 고통의 심연에서 자신(인간)이 죄인임을 시인하며(3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오직 여호와의 응답만을 기다림은 그가 부인할 수 없는 깊은 신앙인임을 나타냄입니다.
깊은 수렁에서 구출되기 위해서는 깊은 기도가 있어야 하며, 깊은 곳에서의 부르짖음은 구원의 밧줄을 내려오게 합니다.
얕은 곳의 삶
에스겔 47장 1-12절은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신에 이끌려 다니며 환상중에 본 것들로서 성전에서 흐르는 물(생명수)을 따라 1천척씩 4번,
즉 4천척 되는 지점까지 척량하며 건너게 하셨는데 처음 1천척에서는 발목, 다음 1천척에서는 무릎, 다음 일천척에서는 허리, 마지막 일천척에서는 물이 창일하여 헤엄칠 물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성전은 성전 밖의 세상, 성전 바깥 뜰, 성전 안뜰, 성소, 그리고 대 제사장이 하나님과 독대하여 만나는 깊은 곳, 그것도 1년에 한번 들어 갈 수 있는 지성소로 되어있습니다.
인생과 신앙생활에도 발목에 잠기는 정도, 또는 성전 바깥뜰이나 출입하며 사는 얕은 곳, 얕은 믿음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샘물도 얕은 샘에서는 건수가 나오고 깊은 샘에서는 시원한 생수가 나오는 현상을 보게됩니다.
육신의 생활을 영적생활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양심을 버리며, 자녀가 일류대학에 합격한 것만으로 우쭐대는 사람들, 슬픔과 절망 속에 주저앉아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을 잃어버린 자, 시기, 질투, 권모술수, 중상모략, 거짓말하는 자, 영적 불감증에 걸린 자, 인간적 손익 계산에 능한 자, 희생할 줄 모르는 자, 부정적이며 원망을 일삼는 자, 잘난 체 하는 자, 새치기(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는 자... 모두 얕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선왕(善王)이었던 히스기야는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이 그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사자에게 보내자 우쭐해져서 뽐내려고 비밀로 해야할 궁중의 보물창고와 무기고를 열어 보여 줌으로 인하여 큰 재난을 자초하고 맙니다(사 39장). 히스기야는 선왕이요 위대한 인물이었건만 단 한번의 실수, 자랑하고 싶은 얕은 삶 때문에 후회와 부끄러움을 당한 것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 : 13, 14, 15).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으신 분인 것을 알면서도 총독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군중들과 야합, 바라바와 예수님을 바꾼 빌라도와 같은 우매한 얕은 인생을 살아서는 아니됩니다.
“육은 세상을 의식한다. 그러나 영은 하나님을 의식한다.” 스코필드(C. I. Schofield) 말입니다.
깊은 곳의 삶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 : 4)”.
깊은 곳의 인생을 산 대표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깊은 곳에서 사는 자들이란 세상의 기준이나 인간의 판단을 초월해서 사는 사람들로 칭찬을 들어도, 상을 받아도 하나님께만 듣고 받겠다는 사람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가 기도중에 한번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이에 그는 “주여, 하나님! 하나님뿐이옵니다.”라고 했답니다.
깊은 곳에서 사는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합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기에 이른 남녀가 패물은 얼마큼? 아파트는? 자동차는? 하며 혼수 때문에 옥신각신한다면 그들이 진정 깊은 사랑을 한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 : 20)” 이는 예수님께서 70문도에게 주신 교훈으로 이를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것 때문에가 아닌, 보다 깊은 신앙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 하나님을 만난 사람, 성령받고 성령의 권능으로 사는 성도,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성도, 깊은 곳에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성도, 말씀에 생의 뿌리를 내린 성도, 그리스도의 심장과 마음을 품고 사는 성도…
모두 영에 속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로서 깊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호주 시드니올림픽 출전권을 위한 태권도 미국대표 선발전이 미국에서 있었습니다. 두 여자 선수가 결승전에 올랐습니다. 헌데 한 선수가 갑자기 기권을 하고 매트 위에서 내려 왔고, 한 선수는 뒤따라 내려와 그녀를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경기를 포기한 선수는 재미교포 2세‘에스더 김’이었고 겨루지도 않고 올림픽 출전권을 갖게 된 선수는 케이 포’라는 미국인이었습니다. 케이 포는 미국 최고의 태권도 선수였으나 준결승전에서 큰 부상을 입어 사실은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답니다. 에스더 김은 이 사실을 알면서 경기를 할 수 없었답니다.
감동의 주인공인 에스더 김이 춘천 국제 태권도 대회 개막식에 참석코자 1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포와 나는 아버지의 지도로 13년 동안 태권도를 함께 배우며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다. 포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포기해야 할 처지였고, 포가 그런 상태에서 내가 대표 출전권을 얻는 것은 불공정할 뿐만 아니라 태권도 정신인 희생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경기를 포기한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에스더 김이 한 말입니다. 에스더 김은 미국 올림픽 위원회로부터 스포츠 시민상을 받게 됩니다.
희생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며, 인내할 줄 알고 긍정적이며, 용서할 줄 알고 기쁨을 주는 자, 깊은 심연의 수렁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소망을 갖는 자… 깊은 곳에서 사는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절).”
깊은 곳 신앙의 사람도 세수하고 목욕도 하며, 의복도 단정하고 맵시 있게 입어야 하며, 아파트에서도 살고 자동차도 타고 다녀야합니다. 허나 외모에 치중하거나 사치를 하거나 호화스럽게 살려고해서는 아니됩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깊은 것이 진짜 자랑거리요, 인격의 무게가 됩니다.
공손수(公孫樹)란 은행나무의 한문 이름입니다.
공(公)은 한문으로 ‘너‘를 뜻하는 존댓말이요, 손(孫)은 ‘손자’, 수(樹)는 ‘나무’, 즉 ‘네 손자의 나무’라는 말입니다. 은행나무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나무의 성장이 늦어 심은 후 3대가 지나야 열매가 맺기 때문이랍니다.
고통은 완성과 성숙을 위한 시간입니다. 인내는 조급함을 감추는 예술이요, 부끄러움을 막는 무기입니다.
‘인내의 나무에는 금이 열린다.’라는 말이 있는가하면 ‘자발 맞은 귀신은 찬물도 못 얻어먹는다.’라는 우리네 속담도 있답니다.
기다림은 인내요, 인내는 깊은 곳의 삶 속에서만이 가능합니다. 수심 깊은 바다는 동요가 없듯이 깊은 곳의 사람은 조바심 치지 않습니다. 깊은 곳, 깊은 삶,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드러나게 될 삶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눅 6:48,49절).”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13:5,6,8절)”
인간의 삶은, 그것이 얕은 삶이었든지 깊은 삶이었든지 결국은 드러나게 됩니다. 바벨탑의 문명은 무너질 물질 문명이요,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세워질 축복입니다. 이제 우리는 산산 조각날 자아만족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애3:55).”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돈타령 노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수전노가 있었답니다. 그가 일생을 돈타령만 하다가 어느 날 죽었는데 그의 재산이 얼마인가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뿐더러 장례식을 치러 줄 사람도 없어 시청 직원들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장 내용입니다.
“나는 마르세이유 시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식수 때문에 질병에 걸려 일찍 죽는 것을 수없이 목도했다. 내 삶을 희생해서라도 시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로 결심했다. 주위의 욕을 먹으면서도 돈을 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나의 모든 재산은 시청에 기부한다. 이 기부금으로 마르세이유 시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를 바란다.”
모든 것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깊은 신앙의 실행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