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행복한 전도자

거듭난 삶 2011. 6. 1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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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전도자

 

 

( 행26:24~29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7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

사람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행복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간혹 자포자기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애초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다 하다 안되니까 절망한 것일 뿐, 결코 행복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복 추구는 인간의 공통된 본능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 고유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에도 보면 소위 '행복추구권'을 명시한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모두들 행복을 열망하고 추구하지만 정작 행복한 사람을 발견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행복은 그저 인간의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란 말인가? 실재하지도 않은 요원한 유토피아일 뿐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분명히 실재하고, 그리로 향하는 길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듯 옆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저 남의 손에 쥔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 번번이 행복의 길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뭐래도 스스로 행복을 만끽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무도,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굽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결박을 당한채 옴짝 못하는 죄수의 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는 너무도 행복해 합니다. 성경도 그를 행복한 인물의 표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비결이 무얼까?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알아보십시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각자의 처지는 다르지만, 바울처럼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부러울 게 없이 행복한 사람 바울

먼저 본문의 배경을 말씀드리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곳곳을 누비면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바울이 마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체포한 후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던 로마 당국에 넘깁니다. 한편 극렬분자들은 그것조차 용납지 않고 여러 번 암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가이사랴의 로마 총독부로 안전하게 호송됩니다. 이때 바울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자인고로 황제에게 상소하면 로마에 쉽게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에게 보내기 전에 총독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 죄목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심문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종교 문제를 잘 모르는 총독은 골치만 아픕니다.

그때 마침 팔레스타인 북부를 통치하던 아그립바 왕(분봉왕)이 베스도 총독을 예방하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이므로 잘 알겠다 싶어 바울의 심문을 부탁합니다.

이렇게 해서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그리고 로마의 유력 인사들이 다 모여 바울을 심문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런 일이 아니면 어떻게 그 고위층 사람들을, 그것도 한꺼번에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심문 받는 그 기회를 거꾸로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오셨고, 십자가 못박혔다가 부활하셨음을 담대히 증거합니다. 그의 말을 듣던 베스도 총독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던지 바울을 제지시킵니다. 24절.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그는 아마도 바울이 너무 책을 많이 봐서 정신이 돈 게 아닌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당하게 응수합니다. 25절~26절.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 그러면서 옆에 있던 아그립바 왕에게 말을 겁니다. 27절.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유대인임을 감안하면서 적극 전도한 것입니다. 마음이 찔린 왕은 말을 돌립니다. 28절.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 말에 바울이 뭐라고 응답합니까? 유명한 말씀이죠. 29절.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

아마 그는 쇠사슬에 묶인 손을 치켜 들고 말했을 것입니다. 보란 듯이 ...

무슨 말입니까? 자기는 쇠사슬에 묶였어도 행복하지만, 그들은 감당하기 어려울테니 그것은 신경 쓰지 말고, 어쨌든 꼭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한 겁니다. 즉 거기 모인 수많은 귀족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울이 죄가 있든 없든 그곳이 도대체 어떤 처소입니까?

로마 총독이 있고, 분봉왕이 있습니다. 귀족들이 가득합니다. 반면 자기는 죄수의 몸입니다. 한 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죠...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리 죄가 없어도 태연하게 서 있기도 어려운 자리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벌벌 떨고 고개도 쳐들지 못할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전도의 기회로 선용합니다. 그는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열등감을 느끼거나 기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중의 누구도 부러워 하지 않습니다.

그 당당한 자존심, 긍지, 용기 등은 바울이 행복한 사람임을 확증해 줍니다. 비록 아무런 소유도 지위도 권세도 없었지만 그는 환경 조건을 초월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누가 바울보다 행복한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은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대단한 권세가 있은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겁니다. 아무도 바울을 가리켜 감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부럽기조차 합니다. 그런 당당함이 있다면 어떤 처지에 놓이든 정말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것은 땅에서 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신비로운 행복'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참 행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2] 바울이 제시해 주는 진정한 행복의 비결

바울이 그런 행복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꼭 배워야 될 비결입니다.

① 절대 가치의 추구 : 사람들이 불행해 지는 대표적인 이유는 비교 의식 때문입니다.

이 비교 의식은 주로 육신적, 물질적,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즉 상대적인 가치들에 집착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사람은 끝없이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행복을 잡은 듯 하다가 조금 후에 보면 더 깊은 불행의 늪에서 허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죠. 어떤 젊은이가 결혼한 후 '내 집 장만'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허리띠를 졸라 매면서 열심히 저축했습니다. 드디어 5년 만에 20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소원을 이룬 그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입주하던 날은 잠도 못 이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에도 가 보고, 주방에도 가 보고, ...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오랜 만에 대학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 집에서 식사나 하자는 겁니다. 퇴근 후 동부인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가는 순간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파트가 운동장만합니다. 가구들은 으리으리합니다. 기가 죽어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도 좋아 보이던 자기 집이 얼마나 초라한지 ...

며칠 만에 그는 더 불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마 놓쳐 버린 행복을 찾아 더 큰 평수의 아파트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몇년 후 그 친구 집만한 큰 아파트를 장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이 과연 그런 가치관을 갖고 살면서 행복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 육신의 생존을 위해 물질도 필요하고, 지위 권세 명예 등 세상의 이런 저런 것들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그런 것만 갖추면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한도 끝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영혼의 유무 아닙니까? 세상 것들로 육신을 잠시 만족시킬 수는 있어도 '영적 허기'는 채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엉뚱하게 육신적인 것만 가속적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갈수록 불만이 심화됩니다. 더 깊은 불행의 늪에 빠지는 겁니다.

옛날 철혈 재상이라 불리우던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가 있습니다. 그는 유럽 일대를 지배한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 80세 생일날 초상화를 그려 주던 화가에게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내 80 평생에 행복한 삶은 별로 없었다네. 행복했던 시간을 다 합치면 24 시간이나 되려나 ...?"

또 나폴레옹 역시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권력자였지만 쓸슬한 고도에서 임종하며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내 평생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6일밖에 없었노라."

반대로 바울은 이들이 가졌던 그 어느 것도 없었지만, 가졌던 것도 배설물처럼 포기해 버렸지만(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러워 하고 아쉬워 했던 것도 없습니다. 빌4:4(옥중 서신) 보면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다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빌4:12에서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그의 영혼 속에 날마다 '영생의 샘물'이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요4:14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 믿는 자의 영혼 가운데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영생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샘물처럼 솟아 올라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영생의 샘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행복을 위한 필요 충분 조건입니다.

그런데도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려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 착각하고 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예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은 이해가 어쩔 수 없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그런다면 정말 어리석은 것이죠.

이미 내 속에 있는 영생의 샘물에서 신령한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고, 메워진 영생의 샘물을 다시 파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② 절대 의미의 추구 :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찾을 때 행복합니다.

그래서 빅토르 프랭클(유대인 정신과 의사)은 인간을 가리켜 '의미지향적 존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의 올바른 의미를 찾기만 하면 그것에 목숨도 걸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혹은 엉뚱한 데다 의미를 두고 살다가 좌절되어 아니다 싶으면 공허하고 허무해지고, 심한 경우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자살하는 일조차 생기는 것입니다.

언젠가 청소년들의 인기 그룹 H.O.T.의 공연 중 멤버 중 하나가 넘어져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여고생 하나가 자살을 했는데, 유서 내용이 기가 찹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 자신이 싫어서 죽는다." 그저 혀를 차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얼마나 큰 비극이 초래되는지 경고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도 인생의 바른 의미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2세들에게 인생의 참 의미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생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착오를 일으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오해합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게 행복의 길인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영원한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 흔히 사명감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당당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복음 증거를 위해 그는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모든 상황을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결국 그는 인생을 마치면서 승리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그는 사명을 알았고, 그 너머 하늘의 영원한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럴 때 비로소 완전한 행복을 얻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 행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선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날마다 영생의 샘물을 마시고, 영생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부러울 게 없는 행복의 길이 여러분의 삶에 보람되게 펼쳐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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