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지혜
왕상3: 16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17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18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19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20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뉘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21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22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것이 내 아들이라 하매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23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24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 지라 25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26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27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28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참된 어머니의 마음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솔로몬 왕에게, 어느 날 창기 두 사람이 재판을 받으러 나아왔습니다. 창기 두 여자가 아이를 하나씩 낳았는데, 그 둘 중에 한 여자가 자기 아들 위에 누워서 그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여자는 한 아들을 가지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싸웠는데, 솔로몬 왕은 이 두 여자 중에 누가 그 아이의 진짜 어머니인가를 재판해 내야 했습니다. 두 여자가 서로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우겼지만, 분명히 두 여자 중 하나가 살아 있는 아이의 어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 어미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참 어머니며, 누가 가짜 어머니인지를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둘 다 자기가 살아 있는 아이의 어머니라고 말은 하지만, 그 둘 중에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진실 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왕은 그 두 여자의 마음속에서 참 어머니의 마음을 찾아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칼을 가지고 와서 살아 있는 아이를 둘로 나누어 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둘 다 똑같이 '산 것이 내 아들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아이를 칼로 나누어서 주라고 하니까 두 여자가 각기 다른 말을 했습니다. 한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했고, 다른 한 여자는 그 아이의 생명을 위하여서,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고 참 어머니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보고,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산아이의 어머니가 친 엄마가 아니면서도 산 아이의 어머니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자기에게 정말 사랑이 없으면서도 사랑이 있는 것처럼,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것처럼, 眞實하지 못하면서도 진실한 것처럼, 善하지 않으면서도 선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 왕은 두 여자의 말을 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마음의 中心을 보았읍니다. 어느 여자가 참 어머니의 마음을 가졌는지를 찾아내서 재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의 外形을 보거나, 우리가 하는 말을 듣거나 우리의 行動을 보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왕이 그 두 여자의 말을 듣거나 행동을 보고 裁判한 것이 아니라, 그 두 여자의 마음을 들추어내어서 그 마음을 보고 재판했던 것처럼, 주님도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主日을 잘 지켰거나 십일조를 잘 낸 것이나 外形的으로 善하고 眞實하게 보이는 것으로 審判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中心을 보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罪惡으로 더러워져 있는 마음 중심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겉모양만 예수 믿는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어머니의 마음이 없으면서도 어머니인 것처럼 꾸미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속에서 堊한 마음이 일어나고 추하고 더럽고 가증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마음은 덮어놓은 채 겉으로 선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추하고 더럽고 가증한 마음을 눌러 놓고 속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겉으로 진실한 척, 착한 척, 義로운 척, 거룩한 척, 믿음이 있는 척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외형이나 어떤 행동을 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추하고 악한 마음이 있다면 그 악한 마음을 눌러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더러운 속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거듭난 후부터는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대로 행동해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基督敎人들중 주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그 속마음을 바꾸는 일은 하지 아니하고 겉으로만 선하고 의로운 척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겠지요.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셨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하고 너무 다르니까 東問西答을 하는 답답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만나셨을 때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시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하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어서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자기 知識, 자기 方法, 자기 知慧가 옳은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속에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아무 결론 없이 대화를 끝내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과 근본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과의 對話를 통해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겉모양으로 당신을 본받고 따르게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 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정말 신비하게도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 베다니에 오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 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마르다 마음속에 믿음을 넣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만나셨을 때에 마르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굉장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고 그를 살리러 간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는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오빠를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나 다시 살지, 지금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마르다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하시자, 마르다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님이 당장 오빠를 살리실 것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마음과 마르다의 마음에 분명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난다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마르다에게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생각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에는 많은 거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다는 말씀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고 했으나, 마르다는 전혀 그것을 믿지 못하고
"마지막 날 부활에나 살 줄을 믿나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 두었느냐?"
하시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유대인들과 함께 울고 있었던 것은 "나사로가 다시 산다." 는 주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
고 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형편을 볼 때 오빠는 죽었기 때문에, 그들 마음속에 오빠는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함께 무덤 앞에 오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려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돌무덤 안에 들어 있는 나사로를 살리기 위하여서는 돌을 옮겨 놓아야만 되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가 벌써 나흘이 되었으매,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속의 의미는 '돌을 옮겨 놓기도 힘들지만,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뭣하려고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까?'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벌써 썩어 냄새가 나나이다." 하는 이야기는 "돌 문을 열지 맙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왜냐 하면,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고, 돌을 옮겨 놓으면 냄새가 날 뿐 아니라 죽은 나사로의 썩은 시체를 봐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돌을 옮겨 놓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을 것이고, 썩어 냄새가 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죽은 나사로를 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는 오빠가 다시 살 것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돌을 옮겨 놓는 것이나 썩은 시체냄새를 맡는 그 자체가 부담스럽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다 보면 어떤 일 속에서 종종 어려움과 당황스러운 문제들을 당하게 되는데, 우리 마음속에 주께서 이러한 일들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되지만, 만일 믿음이 없다면 우리 마음 안에는 고통과 부담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문을 옮겨놓은 뒤에 나사로를 다시 살리지 못했다면, 썩어 빠진 냄새를 맡고 죽은 시체를 구경한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다시 살릴 것을 믿는다면, 돌을 옮겨 놓는 일 자체야 썩는 냄새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기쁨이 되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 일일것이고 더 신비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되는 큰 기쁨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르다의 부담
똑같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다시 산다고 믿었기 때문에 돌을 옮겨 놓고 싶었던 것이고,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산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시체 썩은 냄새만 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돌을 옮겨 놓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復活을 믿는다면 죽음을 보는 그 자체가 기쁨이 되고 榮光과 感謝가 되는 일이지만, 나사로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돌을 옮겨놓는 일 자체는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도 꼭 같은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을 보면,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은 무덤 문에 있는 돌을 옮겨 놓아야 하는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굴려 주리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돌은 너무 컸기 때문에 쉽게 옮겨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죽음으로 끝장이 났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슬퍼해야 했고, 근심해야 했고, 주님을 따랐던 일들이 그들에게는 부담스럽고 후회스러운 일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실 것을 믿는다면, 그들은 무덤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며,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쁨으로 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선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고 근심하며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알지만, 자신의 죄를 눈같이 희게 씻으셨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해, 여전히 죄와 고통과 근심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는 주를 위하는 일이 기쁘고 즐겁다고 말할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그 일이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 죽음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졌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자신의 마음에 믿음으로 임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은 주를 위하여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할지라도 그것이 부담이나 고통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의 상황을 설교 합니다.
두 명의 여자가 똑같이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참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여자와 어머니의 마음을 갖지 못한 여자의 마음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똑같이 무덤 앞에 섰지만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는 예수님의 마음과 믿음이 없는 마르다의 마음은 달랐기 때문에, 주님은 기쁨으로 무덤의 문을 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마르다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못하면서 껍데기로 예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들에서는 참 많은 전도자들이 선교를 위해서 훨씬 더 고통스럽고 어려운 나라에 자원하여 기쁨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프리카나 베트남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정말 생활이 불편하고 어려운 나라에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서 그 나라를 참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때, 우리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기쁨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심판 앞에서 거짓된 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나듯이 마음에 없는 것을 껍데기로 하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外形的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도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마음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정말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寶血이 우리를 罪에서 解放하셨다는 믿음과 예수님의 復活을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무덤 앞에 선다면, 우리는 기뻐하며 찬송할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든지, 내가 들어갈 무덤 앞에 설지라도 믿음이 있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믿음을 우리들 마음속에 주셔서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지, 마음에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는 그런 신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받으시지도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냄새가 나지만 오빠가 다시 살 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부담스럽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우리 속에 있다면, 어떤 길로 가든지 주님과 같이 가는 길은 부담스럽지 아니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의 솔로몬 왕의 재판 이야기와 더불어 현대판 솔로몬식 재판들을 전해드립니다.
미국에서는 아파트 월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으로부터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사 비용이 없어 그대로 머물다가 집주인으로부터 法廷에 告訴를 당한 한 黑人女性에 대한 裁判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판사에게 가난한 자의 설움과 고통을 호소하였고 이를 지켜보던 판사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돈지갑을 꺼내더니 현금 500달러를 불쑥 내놓았고 이것을 지켜보던 陪審員들도 제각기 현금을 내놓아 이날 모금액은 2천300달러였다고 합니다. 處罰대신 溫情의 손길을 베풀어 준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솔로몬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懲役刑을 살아야 할 孤兒로 자란 20대 靑年이 後援者의 간곡한 선처에 감동한 판사에 의해 벌금형으로 풀려났던 사건입니다.
이 청년은 常習的으로 절도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實刑 宣告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善處를 호소하며 그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후원자가 나타났습니다. 제주도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이 후원자는 고아인 김 씨와는 血緣關係나 이웃도 아니었지만 잠시 그의 식당 從業員으로 일하였던 이 청년의 誠實함을 보고 올바른 사회인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며 재판부에 석방을 호소하면서 500만원의 벌금까지 대납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판사는 피고인을 돕겠다는 후원자가 나선 사정을 감안하여, 아직 나이 어린 피고인에게 다시금 사회의 온정을 받아가면서 열심히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해 累犯기간 중임에도 불구하고 罰金刑을 내렸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전에서는 사법 행정조치에 불만을 품고 登記所張을 흉기로 찌른 피고인에게 審理治療를 받아 정서적 안정을 찾도록 한 뒤 석방했다고 합니다. 무조건 징벌을 내리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 판결이었습니다. 담당 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을 엄벌에 처하는 것보다는 건전한 시민으로 거듭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판결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창원에서도 자폐증을 갖고 있는 7살짜리 아들을 둔 절도미수 피의자에 대해 처벌 대신에 직장을 구해주고 연락이 끊긴 아들을 찾아주었다는 훈훈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담당 검사는 피의자를 우리 사회가 따뜻한 정으로 감싸고, 형사 처벌하기보다 올바르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조차 새 인생을 살아가도록 기회를 만들어 준 후원자는 물론 지혜로운 판단을 한 법관이나 검사 모두를 마치 솔로몬과 같다고 칭송하고 박수를 보냅니다.
삭막하고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이럴 때 우리는 아직은 살만한 세상임을 느끼며 우리도 한몫에 끼어서 내 주변에 이런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나게 하기를 바랍니다.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석에서 터진 생수 (0) | 2011.12.05 |
---|---|
죽은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0) | 2011.11.07 |
행복한 전도자 (0) | 2011.06.11 |
선택의 지혜 (0) | 2011.05.22 |
깊은 삶 (0) | 2011.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