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반석에서 터진 생수

거듭난 삶 2011. 12. 5. 18:32
728x90

       반석에서 터진 생수

 

출 17 : 1 -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1. 광야같은 세상.

40대의 나이에 눈병이 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그들은 모두 다 그를 뉴욕의 가장 권위 있다는 안과 전문의에게 가볼 것을 권했습니다. 많은 검사와 치료 끝에 그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화되는 시력을 막을 길은 전혀 없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절망에 빠져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고층의 숙소에서 몸을 던지면 단 몇 초면 모든 고민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 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자기 안에 저장해 놓은 그 무엇이었습니다. 회복될 수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삶을 포기하려는 마음과 다른 한편에는 또한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힘이 속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한편에서 그를 받쳐주고 있는 그 힘을 의지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비록 시력을 되찾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는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힘으로 그는 행복하였습니다.

이 힘이 그의 시력을 살려 낼 수 있었습니다. 이 힘이 그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밀어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힘이 바로 크리스챤의 전유물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신앙심인 것입니다.

만약 이 힘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기적은 바로 이 신앙심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이 힘이 섬광처럼 일어납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이 힘을 보내 봅시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버스에서, 이웃 중에 근심이 있어 졸리거나 피로하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빛을 띄우고 내 쪽으로 놀란 시선을 보내는 것을 경험해 보십니까? 아니면 기도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로 나타나지 않으시던가요?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천사들도 경험하지 못한 이러한 기도의 힘, 능력을 체험하며 삽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인의 권세와 기쁨과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한 청년이 예수를 믿게 되어 완전히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17세기 청교도혁명으로 세상이 시끄러워도 종교와는 담을 쌓고 험하게 살다가 아버지를 이어 대장장이가 된 것입니다. 그가 어느 날 아리따운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아내가 소유하고 있는 책 중에 종교서적을 읽다가 그만 신앙의 감화를 받아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열정적으로 성경을 읽다가 가슴에 뜨거운 불이 붙어 견딜 수 없을 만큼 되어 전도자가 되었는데 불법으로 설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32세의 나이로 그만 12년형의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수형생활을 마치고 44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으면서도 또 전도를 하다가 또 감옥에 들어가 살아야하는 고달픈 운명을 살게 되었던 것인데 그곳에서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후세에 길이 빛나는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는 책입니다. (The Pilgrimis Progress)

그는 인생의 황금기를 어둡고 냄새나고 음습한 감옥에서 보내었지만 청교도 문학의 꽃이요 영국최초의 소설로 손꼽히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것입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에게 놀라운 신앙의 축복과 또 역경과 그 역경을 이겨내는 지혜로 가득 찬 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또 불신자들에게는 신앙의 길을 안내하고 구원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천로 역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하늘로 가는 역경(逆境)과 승리의 여정" 즉 구원과 더불어 신앙 안에서 영적인 세계와 지혜를 새롭게 배우는 새로운 삶의 길을 가르쳐주는 책인 것입니다. 그 길의 끝에 바로 천국이 있습니다. 가나안이 있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도성,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광야 길은 (즉 예수 믿어 구원받은 후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도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전에, 예수 믿기 전에 고난에 고난을 거듭하며 살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예수 믿게 되면 그 고난을 면제받은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이 예수의 사람으로 다듬어 지고 새롭게 능력을 덧입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하여 훈련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광야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이 당신을 훈련시키는 때에 기꺼이 그 훈련을 잘 받아서 능력있는 훌륭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군인이 되기 위해 논산훈련소 연병장의 모든 모래 먼지가 내 몸을 덮게 되어 고된 훈련의 과정을 겪어야 군인이 되듯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꾼이요, 그리스도로 축복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광야에서의 이러한 훈련의 과정들을 기꺼이 이겨내어 신앙의 군사들이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훈련을 잘 받게 되면 실전에 유능한 군인이 되어서 자신의 목숨을 지킬 뿐 아니라 공도 많이 세워 상을 받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여러분과 함께 이 광야 길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고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말씀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광야는 무엇일까?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고 나온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물론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야만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지정학적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홍해를 건너 북쪽의 지중해 해안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까운 쪽으로 가도록 하시지 않고 다른 쪽 방향 오히려 더 먼 코스를 정해 주십니다.

출애굽기 3:12에 보면 모세가 호렙(시내)산에서 양 무리를 치다가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산으로 백성을 이끌고 와서 나를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결국 광야로 나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시내산으로 가야하는데 이것은 가나안쪽 방향과는 정반대인 약 130도 정도의 남동방향으로 틀어져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이 방향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곳이 있는데 홍해 건너 저편의 수르 광야 그리고 쓴물이 나는 오아시스를 단물로 바꿔주신 마라라는 곳에서

출 16: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리고 다시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주가 있는 엘림이라는 곳입니다.

출애굽기 16장 1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엘림을 지나 신광야를 지나면 호렙산에 이르게 되는데 이 신광야에서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16장 2절입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베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 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

여러분 이 얼마나 맞는 말입니까?

"우리가 주려죽게 되는구나, 우리가 괜히 예수 믿는다고 하다가 이 고생을 하는구나, 차라리 예수 믿지 않던 옛날 방식대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적

당히 사기 치고, 적당히 해먹고, 적당하게 눈감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구원 얻는다고 나와서 교회 나와서 이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맞는 말입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말을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는 적어도

"여러분 감사합시다. 우리가 그 종살이하며 겨우 얻어먹던 밥보다 얼마다 더 떳떳합니까? 우리가 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속절없는 삶을 살다가 이런

자유를 맛보게 되었는데 무슨 소원이 더 필요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

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 까요.

출애굽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함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리고 매일 만나와 또 적당한 시기에 메추라기를 내려 보내어 주신 것들입니다. 그들 백성들의 각기 가족 수대로 그것을 거두어 먹게 하시고 남는 것도 없이 모자라는 것도 없이 정확하게 그들에게 채워 주셨던 것입니다.

3. 르비딤의 교훈.

그 사건은 또 그렇게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안식일을 제외한 매일 만나를 거두었고 입맛이 떨어질 때쯤이면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그들 중에 떨어졌습니다. 그날로부터 그들은 먹는 것 때문에는 더 이상 원망하고 고통 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으로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호렙산이 멀리보이는 르비딤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의 어리석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17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니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물이 갈 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들의 네 번째 불평이 또 터져 나온 것입니다. 르비딤에 오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양의 위장이나 방광으로 만든 물통의 물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당연한 것일 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애굽에서부터 신 광야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하심과 채워주시는 능력과 기적들을 누리며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아야하는 것, 이것이 택함 받은 백성의 지혜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또 불평이 나옵니다. 또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이 백성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4. 반석을 치라.

하나님도 이쯤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벌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아이고 이제는 포기해야겠다. 너희들을 보니 한번 두 번 이라야 말이지 이제는 내가 너희들을 징벌로나 갚아 주겠다"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왠일입니까? 모세의 백성들의 원망에 속상해서 부르짖는 기도도 들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7: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야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네가 홍해를 쳤던 그 지팡이가 있지 않느냐. 그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쳐라 그러면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올 것이다.

그 물로 백성의 기갈을 면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번에도 또 이렇게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사랑은 얼마만한 것입니까요? 드디어 반석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반석은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으로 묘사되는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큰 반석을 피난처요 요새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 반석을 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자신을 때리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TV 연속극 중에 "야망"이라는 사극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교육하는데 있어 자식의 잘못에 대하여 잘못한 자식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아리를 걷어 놓고 잘못한 자식이 보는 앞에서 피가 날 때가지 때립니다. 그러던 아버지가 일직 돌아가십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과 훈계를 받고 자란 큰 형이 어느 날 동생들의 잘못을 보고 그 동생들을 때리지 않고 형인 자신의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피가 날 때까지 때리니까 동생들이 웁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더 깊이 반성하는 것입니다.

잠깐 본 것이었지만 코끝이 찡하는 감동을 받은 장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더 할 나위 없는 사랑이요 아픈 징계요 교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몸에 때리시고 찢으시며 백성들, 자식들의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시며 스스로 징계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반석을 때리며 아프게 매질하는 그곳에서 터져 나온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고 허리에서 흐른 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 그 사랑하시는 아들 되시는 예수님, 아니 하나님 자신이 직접 아들 속에 오셔서 골고다의 언덕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으로 쓰여져서 이마에 피가 흐르고 손과 발목에는 못이 박혀 나무 십자가에 메어 달리시고 온 몸과 옆구리는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려 흐르는 피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에게 값없이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으며 고통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행한 죄를 그대로 징벌하지 아니하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야의 교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전 10장 3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다 같이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호렙산 반석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 반석이 매를 맞고 창에 찔려 신령한 음료, 즉 구원과 축복을 주는 생수를 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여 이 광야, 이 호렙산 반석의 교훈을 값있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 대하여 값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의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하는 말씀의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지나게 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광야의 의미는 구원을 일깨우는 장소입니다. 또 감사를 배우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죄성을 없애고 연단하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행하여진 이스라엘의 신앙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유지 하기는 커녕 잃어버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염두에 없고 자신들의 욕구와 상식을 따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 지혜스러운 줄 알고 사건마다 불평과 불만투성이의 악한 행동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고 굳세어지라고 연단하신다는 깨달음이나 감사한 마음은 없었고 더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을 하여 스스로 고난에 빠졌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어떠했습니까?

첫째, 구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우셨습니다.

둘째, 고난 속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몸을 찢어서라도 우리에게 축복을 안겨 주셨습니다.

넷째,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고로 서서히 감당할 만한 시험을 연차적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능히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 세상 곧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떠났음을 날마다 기억합시다. 비록 광야의 거친 산과 골짜기가 있다할지라도 이제 애굽에서의 종 된 삶, 지옥으로 끌려가는 저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불평한다 할지라도 그 무리 중에는 하나님께 감사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 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가야할 길에서 애굽에서의 생활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시마고 약속하신 가나안을 바라보며 미래의 꿈에 부풀어 감사하며 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부류의 사람들 중에 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홍해에서 기적을 보이시고 마라에서 기적을 보이시고 르비딤과 신 광야에서 또 기적을 보이시고 그리고 호렙산 반석에서 또 은혜로 이 기적들을 베푸시며 저들을 훈련시켜 지키시며 보살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까지 이르게 하시려 합니다.

이스라엘민족의 출애굽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배우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의 그 고난의 피와 물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을 체험하는 때마다 감사드리고 그릇된 믿음을 회개하고 그래서 또 신앙이 자라고, 하나님 앞에서의 겪게 되는 시험들에 합격점을 받도록 이겨내고, 점점 더 강한 믿음과 신앙의 소유자가 되도록 훈련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힘입어 더욱 강력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의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을 맞으며  (0) 2012.01.02
기쁨의 좋은 소식  (0) 2011.12.16
죽은자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0) 2011.11.07
솔로몬의 지혜  (0) 2011.09.18
행복한 전도자  (0) 2011.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