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16:12-14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요6:41-59)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
성들과 같은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
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平和를 구하나 참 평화가 없습니다. 安全을 구하나
참 안전이 없습니다. 사랑을 구하나 참 사랑이 없습니다. 만족을 구하나 참
만족이 없습니다. 행복을 구하나 참 행복이 없습니다. 결과는 원망과 불평
,
불만이 계속되는 삶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여유가 있고 풍족한 생활을 하면
서도 좌절과 실의와 허무감, 그리고 불만족 가운데 사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참된 의미와 희망과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삶의 양식이 없기 때문
입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인간의 참된 양식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의 떡,
참된 양식인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永生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예
수를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희생에 관하여 계시하신 것, 즉 그 십자가에서 예수의 보배로운 몸이 우
리를 위해 버려지셨다는 것과 그의 피가 우리의 구속(구원)을 위해 흘려졌다
는 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
리 죄를 속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
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같은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대인
들은 靈的인 것보다 肉的인 일에 보다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오직 영에 대해 관심이 많고, 육에 속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부부라 할지라도 속해 있는 부분이
다르면 몇 십년을 살았어도 타인입니다.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했느냐의 구별은, 보는 것과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 둘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가령 무엇을 깨닫는다고 할 때, 이 깨달음도 그가 가진 관
심에 기준해서 깨닫게 되며 무엇을 보아도 관심대로 보여집니다. 같은
것을 놓고
보더라도 육에 속한 사람은 돈으로 보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진리로 보여
집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 완전하게 알
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남편이 은근히 옆집에 사는 부인을 좋아해서 그 집 음식이
면 무엇이든 다 좋아 보이고 맛있다고 해서 부인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꾀를 내어 그 부인은 옆집에서 김치를 얻어 밥상에 올려놓고 김
치 맛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남편은 "이걸 김치라고 만들었느냐"고
짜증을 내며 맛이 없다고 투정 을 했습니다. 다음 날은 자기 집 김치를 내놓
으며 옆집에서 가져왔다고 했더니, 남편은 맛을 보자마자 "이것이 바로 김치
다"라고 아주 만족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입맛까지도 마음가는 대로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관심이 다르고 世界觀이 다르면 서로 막혀 이
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서로 단절되어 통할 수 없는 것처럼 답답한 일은 없습
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피차에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이 시대에 그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에게 말씀(대화,communication)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
인 대화는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보내
신 성령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인간은 사랑으로서 응답해야
대화의 기적(communication)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대화와 사랑의 관계는 마치 피와 몸과의 관계에 비길 수 있습니다.
혈액 순환이 정지되면 몸은 죽게 마련입니다. 대화가 끊기는 때에 사랑은 죽
고 반감과 증오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대화는 죽음의 관계에서 소생을 이
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화의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대화를 들으시고, 우리의 찬송과 기도, 그
리고 사랑의 봉사와 헌신으로 그 대화에 응답하시므로 대화의 기적을 체험
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동생에 관한
일을 물으시려고 그를 불렀을 때, 모든 시대를 통해 계속 메아리치고 있는
이 비극적인 대답을 합니다.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비극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
나님께서 살인범 가인을 부르시는 참 뜻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묵살
하는 인간의 無知함을 드러내는 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
로 죄인된 인간들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마틴 부버는 대화를 "상대방의 처지를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
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처지를 말씀과
성령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말씀과 성령이 역사할
때 삶의 기적은 체험되는 것입니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어느 조각 작품에 어머니의 유방은 풍만하여 젖이 철철 넘쳐흐르
고 있는데 그 어머니 품 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유난히도 바짝
말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
는 애써 젖을 먹이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데 어린아이는 도무지 먹지 않으려
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의 젖이 풍부해도 그것을
거절하고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자 충만한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
들에게 참된 양식을 공급하시고자해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만 하
는 것입니다.
1841년 미국 汽船이 빙산에 충돌했습니다. 구명 보오트 한 척에 기어
오른 사람이 너무 많아 홈즈 선장은 그중 일부를 파도 속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는 살인죄 판결을 받았으나 타일러 대통령의 특사령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때의 논쟁에서 <구명보오트 윤리>(Lifeboat Ethics)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부의 생존을 위하여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논리를 배격하십니다. 사람이 5천명이고 떡이 다섯 개일 때
강하고 우수한 인간 다섯 명을 먼저 먹여 살리자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것은 빌립의 타산적이고 계산적인 믿음입니다. 다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인간
의 계산이고 强者의 思考方式일뿐입니다. 예수님은 다섯 명만이 아니라 5천
명을 다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떡이 남는 풍성하고 참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糧과 質의 주님이 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
이다“.(12-14절)
무엇을 모든 은혜 가운데 최고의 은혜로 보았습니까? 구원입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하면 그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마셔야 될 저주의 잔, 심판의 잔은 예수님께서 대신 마
시고, 나의 손에 구원의 잔을 들려주신 이 놀라운 은혜, 이것보다 더 큰 은
혜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시편 저자는 너무나 감격하고, 너무나 빚진 심정을 자신이 감당하지를 못해서 서원을 했습니다. 무슨 서원했을지는 뻔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내 짧은 한 생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내 생명도 사용하십시오. 내 시간도, 내 재물도, 내 자식도 다 사용하옵서소”.하고 서원 했을 것입니다. 빚진 심정으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큰 은혜를 갚을 수 있느냐를 생각하니 갚을 일이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하고 서원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 오고 기쁘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자기 심정을 표현하겠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이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일
“나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내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내 앞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여러분이 누구냐가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의 地位나 身分이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이 어느 정도 有名한 사람이냐, 無名한 사람이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기뻐 뛸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최대의 대우를 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라도에게 주지 않는 구원을 나에게 주셨지 않습니까? 시이저 황제에게 주지 않은 구원을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주셨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위대한 석학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지 아니한 구원을 무명의 나에게 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을 주신 것이 분명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최대의 대우를 해주셨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만 생각하면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치를 여러분의 직업에서 찾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무게를 여러분이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는 사람인가를 놓고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세상적인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놓고 여러분을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주셨는가? 나는 그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사람대우 해 주셨네. 아니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대우해 주셨네. 그렇기에 나에게 이런 엄청난 구원을 값없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이 세상에서 나보다 행복한 자가 어디 있는가? 나보다 더 출세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 나보다 한 생을 더 보람있게 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여러분이 이러한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내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개와 고양이도 내가 구원받은 것 때문에 기뻐 뛸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구원의 축복을 찬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와 같이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꼬?하는 빚진 심정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서원 하는 心情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영광을 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남은 생을 온전히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 참된 인생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생
명력을 불어넣으시는 성령이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이 보다 더 풍요롭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